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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했어도 ㅣ 슬로북 Slow Book 3
함정임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7월
평점 :
소설가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쓰는 사람이라고 한다. 소설은 만들어진 이야기지만 그 속엔 소설가의 진짜 삶과 경험들이 그대로 녹아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소설가들의 인생에선 유년기의 작은 경험 하나도 모두 소설의 자양분이 되고 소재가 되기도 한다. 작품을 위해 이야기를 수집하고 끊임없이 써내려가야 하는 삶이 쉬울리는 없다. 가끔 한 글자조차 쓰기 어려운 순간에도 글을 쓸 수 밖에 없는 소설가는 그럼에도 자신의 인생을 조각조각 남기고 그 흔적이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라며 자신의 시간을, 일상을, 여행을 기록하고 또 기록한다.
작가란 기억 또는 추억을 파먹고 사는 족속들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소설의 팔할, 아니 그 이상이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기억을 좇는 추억의 추적자, 기억을 찾고 있는 추억의 탐험가로 살아간다.
소설가이자 대학교수이기도 한 저자는 불어를 전공하였기에 프랑스 문학에 대해 깊은 애정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보들레르, 랭보, 카뮈등 프랑스 문학의 거장들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는 여행기와 소설가로서의 삶의 모습과 고뇌, 그리고 그속에서 그가 깨닫고 느낀 개인의 아픔과 사회의 고통까지 괜찮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저자만의 언어와 시선으로 위로와 안부를 전한다. 문학작품부터 미술과 음식, 여행까지 다양한 방면의 경험과 지식을 풀어 놓는 글에선 소설가로서의 단단한 힘을 느낄 수 있지만, 그 속에서도 느리지만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여러 단편들이 천천히, 하지만 깊숙히 내 머릿속을 채워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작가란 그저 이야기의 재미(오락)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의 맥락 속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과 흘러가는 시간에 맞서는 예술의 의미를 소설을 통해 던지는 존재이다. 뭇사람들의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어긋나고 응어리진 현실을 풀어주고 어루만져주는 존재가 작가이고, 소설이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글에선 그의 애정을 듬뿍 받는 것들이 등장한다. 불어 전공자로 영향을 받게 된 프랑스 문학과 작가들의 삶을 따라 가는 여행은 소설로 만났던 공간을 실제로 마주하게 되었을 때의 벅찬 감동이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기도 하고, 저자가 현재 살고 있는 부산 달맞이 고개의 탁 트인 전경을 자랑하는 서재에서 파란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저자의 뒷모습이 눈앞에 그려지기도 한다.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얻는 파릇한 에너지, 그리고 부모로서, 또 자식으로서 살아가는 나와 다를바 없는 생각과 마음이 부드럽고 섬세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글을 업으로 살고 있는 작가로서의 무시 못할 내공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새로움은 무조건 낯선 것, 먼 곳에 있다고 고집했었다. 자기 자신이야말로 하루하루 성장하는 새로운 존재하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고유한 것, 아득한 곳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시절의 착각이었다.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되뇌이는 괜찮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다. 누구의 위로도 귀에 들리지 않는 때에 언뜻 눈에 박히는 또렷한 글자가 머리와 마음을 뒤흔들며 미친듯이 출렁이던 파도가 거짓말처럼 잔잔해지는 순간의 고요함이 가져다 주는 평온의 힘, 그것이 글이고 책이 가지는 힘이다. 뇌리에 급격히 박히는 강렬함이나 촌철살인의 문장보다도 글 하나하나에 진심이 묻어나는 은은하지만 짙은 향기를 가진 글은 서서히 나의 시간을 물들이며 온 몸에 퍼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 책이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던 것 같다. 대놓고 위로의 말을 건네는 많은 책들에선 사실 그다지 큰 울림을 받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이 책은 저자 자신이 보고, 읽고, 느낀 것들을 글로서 따라가다 보면 아름다운 프로방스를 보기도 하고, 가슴 뜨거웠던 우리의 광장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기도 하고, 나의 고향이기도 한 그리운 부산을 느끼게 해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여행하며 일상을 환기시키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해준다. 글쟁이로서 글을 쓸 수 밖에 없는 운명으로 많은 곳을 다니며 꾹꾹 눌러 쓴, 자신이 겪어온 삶의 조각들을 우리와 함께 나누며 위로와 감동을 줘야하는 작가로서의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진실한 안부의 말이 느껴지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이란 한 사람의 생을 집요하게 추억하는 여정이라고 했던가. 여행이 끝나자 비로소 새로운 길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