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여자로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보이지 않는 차별과 힘겨움을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것. 어린시절 명절에 왜 엄마와 나는 쉬지 못하고 음식이며 설거지며 일해야 하는지, 그럼에도 모든 음식을 남자들이 다 먹길 기다렸다 먹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저 당연시되는 일들을 묵묵히 견뎌내는 엄마와 친척들 사이에서 나역시 조용히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되며 겪어야 하는 여성으로서의 공공연한 차별과 한계에 부딪히며 조금씩 서서히, 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직접 경험하며 감내하고 버텨내야 했다. 당연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아무 의심없이 당연시 여기는 순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깨지 못한다면 영원히 그 틀속에 갖혀 살 수 밖에 없다.



안 해야 하는 말을 하는 사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오늘 삼킨 말, 다른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말들을 생각한다.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종전의 히트를 기록한 <82년생 김지영> 저자의 신간인 이 책은 그간 저자의 작품들과 제목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여성들의 이야기다.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60여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특별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사실은 무엇보다 중요하며 감춰지지 않고 드러내야 할 여성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한편 한편이 짧은 단편 소설이지만 여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또 수많은 여성들이 지금도 겪고 있을 진짜 현실을 담고 있기에, 그 씁쓸함이 더욱 짙게 드리워진다. 여성이 사회에서 가지는 많은 역할이 있고 각자 다른 위치에 각자의 상황이 있음에도 여성이라는 기본적인 조건으로 인해 차별과 피해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딸이기에 가족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고,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해도 그냥 넘겨야 하고, 누구의 며느리이자 누구의 엄마이기에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고, 막상 용기내어 꺼낸 이야기들이 묵살 당하고, 별일 아닌듯 넘겨지게 되면 그 상처는 더욱 클 수 밖에 없다. 페미니즘 운동과 함께 최근 일어났던 미투운동처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확산되고 여성들 스스로가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속의 그녀들처럼 아직도 가려지고 버려진 사회의 이면에서 고통스러운 여성들은 너무나 많다. 그렇기에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더 많은 그녀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고 싶었고, 그로인해 더 많은 그녀들의 상처와 아픔이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저자를 통해 다듬어진 많은 이야기들이 서로 다른 곳, 다른 나이, 다른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는 별개의 이야기들 같지만 사실은 여성이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큰 틀 안에서 생겨난 일이기에 그녀들이 삼켜야만 했던 고통이 같은 여성인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로, 학생으로, 직원으로, 손님으로 역할을 다하려고만 했을 뿐 자신이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생각해본 적도 요구해본 적도 없다. 


 

 

 

 

 

충분히 알고 있다. 나 역시 겪었던 일들도 있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들어봄직한 흔한 일이기도 하다. 여성들의 고통을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내가 저자의 <82년생 김지영>을 애써 피하고 읽지 않았던건, 몸소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 부당함과 마주하고 싶지 않고 또 바뀌지 않는 현실을 넌더리가 날 정도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피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저자의 책을 통해 직면하게 된 그녀들의 이야기는 같은 여성으로서 역시나 화가 나고 울컥할 수 밖에 없는 가슴 아픈 일들이다. 하지만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으며 힘겨운 날들을 보내는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의 끝은 그저 슬프거나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우리 주변의 많은 여성들은 일상화된 차별을 당연시 여기며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끝없이 문제제기를 하고 또 이겨내기 위해 비록 작을지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단지 나 혼자만을 위해서가 아닌 내 가족, 내 친구, 내 동료들을 위해 용기를 내고 싸워나가고 또 쟁취해 나가는 그녀들의 모습은 더이상 이때까지 우리 사회가 정의해 둔 수동적이고 연약한 여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성희롱을 당했지만 끝까지 싸우고, 불안정한 고용 환경을 당연시 여기지 않고 여성의 일을 보조업무로 제한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은밀히 일어나는 폭력과 억압에 투쟁하는 그녀들의 모습은 같은 여성임에도 방관하고 무심했던 나를 비롯해 흔한 일이라고, 왜 굳이 당신만 문제 삼냐며 끊임없이 쇠뇌하고 인정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에게 더이상 누군가 대신 말해주길 기다리지 않는 당당한 여상의 모습을 세상을 향해 드러낸다. 비록 아직은 만족할 수 있을 만한 결과가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들이 회자되다 보면 더 많은 그녀들의 아픔과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가 처한 현실을 올바르게 직시하는 것이 중요함에도 나는 그저 불편한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고 또 나의 일이 아니기에 소홀히 생각했던 지난 시간들을 이 책을 읽으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슬프고 또 마음 아프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지만 분명 알아야 하고 함께 이겨내야 할 일들이다. 더이상 피하지 말고, 사소한 일이라며 그냥 넘기지 말고 누군가 대신 나서서 말해주길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나에게도, 또 내 딸들과 이 세상의 모든 소중한 그녀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빛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지키고 누려야 할 평등하고 공평한 시간을 보낼 권리가 있고, 나는 여전히 젊고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같은 과장에게 성희롱 당하다 퇴사했다는 직원은 소진을 보자마자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때 자신이 조용히 덮고 넘어가지 않았다면 소진도 같은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자책했다. 물론 소진은 그녀를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용히 덮고 넘어간 두 번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피해자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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