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로 말할 것 같으면 작년 1학년 시절, 툭하면 싸우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 들어오지 않고 옆반 선생님인 나까지 동원되어 한참 실랑이를 하던 녀석으로 고집이 말도 못하게 세다. 몸은 작은데 어깨며 다리며 어찌나 꽉꽉 뭉쳐있는지 언제나 화가 단단하게 차올라 있었다. 말이라도 걸라치면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내가 안했다고요!'소리 지르며 도망가버리는, 그런 녀석. 주변을 돌아볼 여유같은건 하나도 없고 여덟살이어도 늘 쫓고 쫓기고 있었다. 그 아이가 혼자 방 안에서 혼자 햇살을 응시하고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맑음이와 공기고기가 만날 때도 그런 고요한 시간이었을까. 무심히 툭하고 공기고기 이야기를 설명하는 모습에 마음이 울린다. 내가 보지 못하던 그 아이의 고요를 맑음이가 꺼내어준다.
p14. 엄마는 맑음이를 하루 맡길 데를 찾아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어요.
"어? 그럼 엄마 회사 따라가면 되잖아.
선생님, 우리 엄마는요, 나 맡길데 없으면 엄마 회사에 데리고 가요. 그럼 사무실에 있는 아저씨가 만원도 줘요. 책상에 앉아서 유튜브도 보고. 나는 엄마 회사 가면 좋던데?"
우와, 너희 엄마네 회사는 되게 좋네. 선생님도 아이 맡길 데가 없어서 학교에 데리고 올 수가 없어서 동동거린적이 있어.
"그럼 어떻게 해요?"
우물쭈물 얼버무린다.
"응, 좀 멀어도 할머니네 집에 부탁드렸지 뭐."
사실 오늘도 코로나 19로 개학이 연기되는 바람에 아이 혼자 집에 있을 수가 없어 조퇴를 쓰고 얼른 집에 들어와야 했다. 조퇴나 연가, 재택 근무조차 할 수 없었다면 나는 어쩌고 있을까.
여우할머니 같은 이웃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하고 말하려는데 그새 다른 아이가 한 마디를 보탠다.
"우리는 할머니도 우리 못 봐주니까 언니랑 둘이 집에 있어요."
사실 오늘처럼 돌봄교실에라도 올 수 있는 친구들은 다행이다. 집에 혼자 있어야 하는 고학년 아이들도 불안하긴 매한가지기 때문이다. 혼자 있는 집에서 혹시나 안전사고, 혹시나 강도나 학교폭력, 혹시나 혹시나. 상담을 해보면 혼자 아이를 키우는 보호자들은 어쩔 수 없이 일하러 나오면서도 집에 있는 아이 생각에 불안함을 호소한다. 문을 꼭꼭 잠근 채 '우리 식구 아니면 문 열어주면 안돼' 단단히 주의를 주고 나오면서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떠올리는 워킹맘, 워킹대디들이 우리 집 뿐만은 아닐거다.
내가 자랄 때, 집에 사람이 없어서 심심하고 무서우면 얼른 같은 동네 친구네 집에 갈 수 있었던 마을 분위기와 이웃사촌의 역할을 엄마 친구 이모, 아빠 모임 삼촌, 학교, 학원이 대신 메워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씁쓰레하다. 물론 우리도 서로 아끼고 위하지만 우리 삶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 나는, 우리는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
어쩌면, 이웃에 여우 할머니가 있어도 선뜻 부탁할 수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벌써 흐리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더더욱 흐리다.
부모님이 안 계실 때 언니랑 집을 본다는 아이에게 '그래도 너희들은 둘이 의지하며 있을 만큼 자라서 다행이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건 사실 맑음이네 엄마 같은 작은 기대에서 출발할지도 모르겠다.
여우 할머니의 고약한 잔소리와 인색함 뒤에 숨겨진 삶의 고단함을 헤아리고, 의지처가 되어줄 거라는 기대.
혼자 키웠지만 똥꼬발랄하게 잘 자라준 맑음이가 여우 할머니와 마음을 나누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이가 되리라는 기대.
나는 나 자신 외의 사람들에게 어떤 기대를 품고 살고 있는지.
가족 아닌 누군가에게 기대받아본 적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p38. 우리 엄마는 밥하기 싫을 때 카레라이스 해 주거든요.
"선생님, 잠깐만요! 카레라이스도 밥인데요? 열심히 요리해야되는 거잖아요"
"그럼 집에서 밥하기 싫을 때 뭐 해먹어?
"라면이요."
"물에 밥 말아먹어요."
"우리 엄마는 볶음밥 해주세요"
"시켜먹으면 되지"
찬 밥에 물 말아서 김 한장 얹어 먹는다는 여우 할머니. 엄마가 밥하기 싫을 때 해주는 음식이 카레라이스라는 맑음이.
가만 보면 맑음이네 엄마, 참 야무지기도 하다.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일하고, 조금 더 나은 집으로 이사하고.
의지할 곳 하나 없을 때 까다로운 주인집 여우 할머니에게 아이를 맡기는 배포와 오만원을 쥐어드리는 애교와
돈 대신 홍시 한 봉지를 사들고 퇴근하는 마음씀씀이까지 보통 엄마가 아닌 것 같다.
밥해 먹기 싫어도 야채를 송송 썰고, 고기가 없어도 버섯으로 대신하는(앗 잠깐. 맑음이가 초식동물이라 그런가? 그렇다면 여우할머니는 아끼려고 고기를 덜 먹고 풀떼기만 먹어서 너그러워졌는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든다ㅋㅋ) 이 삶의 의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품이 넓고 맑게 자라는 맑음이는 엄마를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냉장고 배고플것 까지 헤아리며 장을 보고, 물을 끓이고 채소를 썰고, 카레 가루를 풀어 넣는 이 요리 과정 자체가 품을 넓어지게 하는 마법일지도. 아끼는 누군가를 위한 밥상은 얼마나 풍성한가. 스스로를 초라하게 대접하던 여우 할머니가 맑음이와 함께 카레라이스를 만들며 두 그릇이나 자신을 대접 하는 장면이 참 좋다. 맑음이네 엄마가 맑음이를 통해 품 넓은 삶을 키운 것처럼, 나와 만나고 함께 자라는 아이들이 사랑과 너그러움을 전하길 소망해본다. 아참참 그럴려면 밥해먹기 싫을 때 배달음식과 라면 대신 카레라이스정도는 해야되는 것인가. 쉽지 않은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