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언어가 될 때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이소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험이 언어가 될 때는 남성중심주의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시각에서 저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질문을 던지는 학술 에세이다. 여성이자 노동자 계급으로 살아가며 마주했던 경험,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고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하게 된 생각과 주요 학자들의 견해를 엮은 글이 총 6장에 걸쳐 전개된다. 파트 1에 속하는 <보편 X 특수>, <지식 X 권력>, <X > 장에서는 페미니스트로서 세상을 바라보며 인식한 것들을 서술한다. 이를 바탕으로 파트 2<계급 X 여성>, <자본 X 시간>, <생산 X 소비>에서는 남성중심적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며 각 주제들을 교차시켜 사고한다.

 

나는 쉽게 보편적이라고 느껴지는 감정과 사고를 경계하려 한다. 그것이 정말 보편적일까? 그것이 보편적이라고 누가 정의할까? 누가, 어느 위치에서, 무엇을 '보편'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어떤 존재는 지워지고,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엄연한 '대중'임에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렵고, 평생을 시설에 수용되어 살아가고 있는 많은 장애인들처럼 말이다. 보편에 속하지 못하는 특수한 존재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인정받으려 투쟁한다. 보편이라는 개념, 즉 기존 규범을 그대로 둔 채 특수를 인정하고, 그 수를 늘리는 것은 진정한 해답이 되지 못한다. "이처럼 특수를 인정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보편의 외연을 확장하는 것이다. (...) 나는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보편이라 생각한다(p.45-47)." 휠체어를 타거나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 노인들을 보편적인 인간으로 설정하여 사회 편의 시설이나 교통 시설을 설계하는 것, 가정에 돌보아야 할 존재가 있는 노동자를 이상적인 노동자로 여기고 복지 시스템이나 노동시간을 설정하는 것 등등. 보편의 외연을 넓혀서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인정받아 존재를 증명하려 투쟁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이 아닐까.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할 때도, 휴식할 겸 산책하러 나가도, 집에서 가만히 숨을 쉬기만 해도 늘 무언가를 소비하고 있고, 소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좌절할 때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하지 않는 삶이란 불가능하단 걸 깨달을 때면 이놈의 자본주의,라며 한숨을 쉬기도 하지만 금방 새로운 소비 거리를 찾아 나서곤 한다. 소비사회에서 정체성은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물건을 소비하느냐에 따라 규정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소비의 장에서 약속된 룰에 따라, 내가 어떠한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지금 어떠한 감정을 담지하고 있는지 연출한 사진의 홍수가 바로 인스타그램이다(p.157)" 내가 소비하는 것이 곧 나라는 말이 아찔하게 느껴진다. 하나의 소비에 연관된 수많은 존재들의 고통에 그동안 나는 얼마나 무감했는가. 상품을 소비하며 해소하거나 충족시켰던 욕망들이 진정 나의 욕망이었을까. 필요에 따라 소비할 순 없는 걸까.

 

저자의 솔직한 고백과 성찰, 비판적인 생각은 저자와 같은 여성이자 노동자 가정에서 살고 있고,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고 있는 내게 와닿는 부분이 많았다. 어렵지 않은 글이지만 여성, 노동, 계급, 소비, 페미니즘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다. 책을 읽으며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나도 모르게 당연시했던 차별의식과 무시하고 있던 타인의 고통, 남성중심적 자본주의 사회에 찌들어있는 생각들을 발견하여 조금은 고통스러웠다. 저자의 말처럼 나는 여전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고, 다른 존재를 타자화하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몰랐던 것을 알게 되며 불편해지고 때론 고통스러워지는 순간을 마주하는 것에 게을러지지 않을 것이다. 치열하게 질문하고, 성찰하며 지금과는 다른 사회를 상상해나갈 것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잊히고, 지워지고, 소외된 존재들이 많다. 변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경험을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해 여러 질문을 던지고, 더 깊이 사고하도록 만드는 이 책은 남성중심주의와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데에 작은 시작이 되어준다. 장애, 인종, 젠더, 민족 등 이 책에서 주로 다룬 주제 이외에 더 교차시켜 보아야 할 주제들이 많다. 보이고, 들려야 할 경험이 더 많다는 것이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지식과 규범에서 배제된 존재는 없는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는 일, 그리하여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들의 경험이 계속해서 언어가 되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