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식탁
야즈키 미치코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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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이시바시 유’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아이가 친엄마에게 아동학대를 당하다 목숨을 잃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충격적인 도입부 이후, 소설은 이시바시 유라는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같은 아이를 키우는 세 엄마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전개된다. 독자는 도입부의 충격적인 사건이 누구의 이야기일지 궁금증을 가진 채로 소설을 읽어 내려가게 된다.


같은 나이의 이시바시 유를 키우는 세 가정의 모습은 가정 형편이나 부모 관계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아마도 작가의 의도는 독자가 세 가족 중 하나에 비슷하게 맞아 들어가면서 등장인물 중 한 명과 독자를 일체화 시키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이런 장치를 통해 아동학대나 가정폭력이 어떤 가정에게나, 어느 부모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더욱 경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준다.


90년대나 2000년 초반만 하더라도 학교나 가정에서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체벌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사랑하기에 ‘때려서라도’ 가르친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암묵적으로 용인했던 것인데, 체벌 도구와 때리는 횟수를 정하면 괜찮지 않냐는 의식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체벌의 용인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점점 체벌과 폭력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진다는 것이고 체벌을 경험한 아이는 반드시 성인이 되어 가정이나 사회에서 아이들을 다룰 때 폭력을 도구로 쓰는 게 대물림 되기 때문이다.


소설은 학교 폭력을 저지르며 치매에 걸린 친할머니를 더럽다고 발로 차는 아이와 매번 온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형제와 싸우는데 도무지 부모의 말은 듣지 않는 고집불통의 아이를 보여주며 독자에게 ‘저런 아이를 체벌하지 않고 어떻게 키우냐’하는 무서운 공감을 이끌어낸다. 내가 낳은 아이이기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엇나간다면 폭력을 쓰더라도 바로잡아야 한다는 비뚤어진 합리화, 자식에 대한 소유욕과 지배욕이 소설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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