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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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아무 설명과 소개 없이 읽는다면, 아마도 독자들은 책의 마지막, 저자의 「​감사의 글」​에서 놀라움에 잠시 정지된 순간을 맛보게 될지도 모른다. 칠레의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는 프리츠 하버, 슈바르츠실트, 그로덴티크,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와 같이 세상의 진실을 마주했던 수학자와 과학자들의 역사적 사실에, 문학적 허구와 작가적 상상력을 버무려 너무나 매혹적인 다섯 가지 이야기를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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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묘하기에 매력적이다. '논픽션 소설'임을 감안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이야기들이 끝말잇기를 하듯 서로의 꼬리를 물고,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를 낳는 벵하민 라바투트만의 기묘한 구성에 독자는 사실과 허구의 경계선에서 길을 잃고 무엇에 홀린 듯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무엇이 진실인지 구분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했다. 벵하민 라바투트의 이야기들은 첫 문장부터 강력한 자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 책의 다섯 가지 이야기 중 「​슈바르츠실트 특이점」​ ​은 이렇게 시작한다.



<베를린 자택에서 차를 마시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배달된 봉투는 1915년 12월 22일 제1차세계대전 참호에서 발송된 것이었다. 봉투는 화염에 휩싸인 대륙을 가로질렀다. 구겨지고 얼룩지고 흙이 묻었으며 한쪽 가장자리가 완전히 뜯겨져나갔다. 발신인 이름은 커다란 핏자국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장갑을 끼고서 나이프로 봉투를 개봉했다.>
-「​슈바르츠실트 특이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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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에게 편지를 보낸 이는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카를 슈바르츠실트'였다. 아인슈타인이 1915년에 발표한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에 대한 상대론적이론으로 아인슈타인 자신마저도 정확한 해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1차세계대전에 참전 중이었던 슈바르츠실트가 보낸 것은 바로 일반상대성 방정식에 대한 최초의 정확한 해解였다. 하지만 이 해解에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너무 큰 질량이 매우 작은 면적에 집중될 때, 시공간이 단지 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다른 부분과 단절된, 빠져나갈 수 없는 심연이 생겼던 것이다. 이를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이라 불렀고, 이것은 우리가 '블랙홀'이라 알고 있는 것의 '수학적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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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첫 번째 작품 「​프러시안블루」​나 두 번째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은 사실의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이 책에 실린 이야기 대부분이 사실과 사실 사이의 공백에 작가가 '문학적 허구의 다리'를 놓은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작가의 「​감사의 글」을 읽고 잠시 정지된 순간을 경험했다. 뒤로 갈수록 허구의 비중이 높아져 문학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글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과 허구의 비중을 고무줄을 가지고 놀 듯 자유자재로 늘였다 줄였다 하는 칠레의 젊은 작가는 논픽션 소설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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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허구다. 뒤로 갈수록 허구의 비중이 커진다. 「프러시안블루」에는 허구의 문장이 하나밖에 없는 반면에 뒤어서는 더 자유분방하게 쓰되 각 작품에서 다루는 과학 개념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심장의 심장」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모치즈키 신이치의 경우는 독특하다. 나는 그의 연구에 나타난 특정한 측면에서 영감을 얻어 알렉산더 그로덴티크의 정신을 들여다보았지만 이 책에서 서술하는 모치즈키와 그의 일생, 그의 연구는 대부분 허구다.>___2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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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매력은 슈바르츠실트 특이점, 슈뢰딩거의 양자역학과 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과학 이론을 독자에게 '이해시키려 하지 않고' 단지 이야기의 소재나 영감으로써 작가가 활용한다는 점이다. 이해할 필요가 없다. 독자는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된다. 작가는 다섯 가지의 매혹적인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한 인간이 작은 책상에 앉아 우주만큼 정신을 확장할 수 있다고, 그러니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길 멈추면 안된다고 말이다.




______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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