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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 48개국 108명의 시인이 쓴 팬데믹 시대의 연시
이오아나 모퍼고 엮음, 요시카와 나기 외 옮김 / 안온북스 / 2022년 2월
평점 :
바이러스에게 온갖 바깥을 내어주고 우리는 문이 닫힌 작은방에 격리되었다. 가벼운 만남은 쉬이 증발해버리고 진심의 관계는 오히려 더 농축된 채로 바닥에 남는다. 대면하지 않기에 용기를 낼 수 있는 말들을 서로에게 전한다. 마음이 담겨 무거워진 말들이 오고 간다. 격리되어 봤기에 우린 더욱 연결된 존재임을 안다.
우린 우리의 방식대로, 시인은 시의 언어로 만남의 부재 속에서도 깊고 진한 소통을 주고받는다. 『그 순간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는 전 세계 48개국 108명의 시인이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함께 쓴 연시聯詩이다. 8명의 한국의 시인들은 답시의 형태로 이 책에 참여했다. 인종과 언어, 장소의 한계를 넘은 거대한 시의 대화를 문을 활짝 열어 받아들인다. 언어에는 거리 두기도 인원 제한도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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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 배가 떠나버리고
당신은 거기에 앉는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교정지의 오자처럼.
그리고 자신에게서 뻗은 길고 붉은 화살을 본다.
화살은 당신이 속해 있던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 공백이 된 그곳을. __36p
미국의 시인 카를리스 버딘스는 코로나로 격리된 사람을 '빨간색으로 표시된 교정지의 오자'로 표현하며, 자신에게서 뻗은 길고 붉은 화살 끝, 내가 있던 그 공백을 쳐다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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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와 고독을 떨쳐버리자.
유배는 이제 질색이다.
신선한 공기. 기분 좋은 아침 산책.
내 마스크는 빙그레 웃고 있다.
그래, 내가 마스크에 웃음을 붙였다.
스쳐 지나가는 당신을 위해.
-도이나 이오아니드, 루마니아
긴 문장을 체로 걸러 위에 남은 단어들 중에서도 다시 일일이 엄선하여 조심스레 배열한다. 시는 에스프레소처럼 생각이 진하게 압축된 채로 어떨 땐 감미롭게, 어떨 땐 쓰디쓴 맛으로 온몸에 퍼져 나간다.
분명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늘 사용하는 보통의 언어들이며 항상 느끼는 일상의 감정들인데, 시인의 통찰력과 언어의 결정決定이 문장을 이토록 찬란하게 만든다.
팬데믹 시대를 함께 헤쳐나가고 있는 시인들의 말들이 끊임없이 노크를 한다. 문을 열고 함께 하자고. 스쳐가는 사람을 위해 마스크에 웃음을 붙인 채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햇살이 좋으면 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의 언어를 붙들고 굳건히 살아가자고 우리에게 강한 연대의 힘을 보여준다.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