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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
김도헌 지음, 이병률 사진 / 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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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 _ 글 김도헌 / 사진 이병률]

 세상 끝 어딘가의 외딴 섬 ‘추크’에 정착한  한 인간의 이야기. 김도헌이 쓰고 이병률 시인이 사진을 찍었다. 처음엔 여행 에세이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자전적 소설에 가깝다. 
 ‘세상 끝’ 이라고 하면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같은 극지를 떠올리는데, 추크 섬은 대표적인 휴양지인 괌에서 그리 멀지 않은 태평양의 미크로네시아 연방에 속하는 작은 섬이다. 낯설긴 하지만 사실은 지구 한 가운데에 위치한 그 곳이 세상 끝의 외딴 섬인 이유는 심리적인 거리감에서 기인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땅에서 홀로 생각하는 인간, 얼마나 완벽하게 매력적인 주제인지! 책을 처음 알게 됐을때 바로 위시리스트에 추가했다. 

책은 어렵지 않게 금방 읽혔다. 하지만 막상 읽고 나니 이 책을 뭐라 설명을 해야 할지 무척 난감해졌다. 처음 기대했던 에세이는 아닐 뿐더러 자전적인 성격을 띄고 있으면서도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깊은 내면의 이야기라고 하기엔 소설의 느낌이 강하고, 내러티브를 말하기엔 신화적인 요소가 너무 강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마디로 정리하기가 참 어려운 책’ 이랄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다시 제목을 보았다. [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 책을 읽는 동안은 마치 여행 에세이 같아보이는 이 제목이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 읽고 나서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이 섬의 풍광이라는 걸 문득 깨달았다. 때론 좋은 사람과 이야기가 장소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장소가 사람과 이야기를 품고 녹여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무척 동경해왔던 아이슬란드가 압도적인 대자연속에서 개인의 내면으로 끝 없이 침잠하게 만드는 땅이라면, 김도헌이 묘사한 추크섬은 상처받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처럼 하나의 풍경으로 녹여내는 조화로운 곳이었다. 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곳은 일상일 뿐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지만, 치열함이 당연해진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일상이 천국보다도 더 멀게 느껴지는듯 하다. 

최근 소길댁으로 불렸던 가수 이효리가 제주도의 관광이 과열되면서 그 동네를 떠나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마음만이라도 떠나서 잠시 쉴 수 있는, 추크섬 같은 땅이 온전히 남아있기를 소원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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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 사랑에 관한 거의 모든 고민에 답하다
곽정은 지음 / 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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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곽정은
 
 칼럼니스트 곽정은의 일곱번째 책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한동안 방송에서 그녀의 발언들이 화제가 되면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건너 듣긴 했었지만, 평소 TV를 멀리하다 보니 직접적으로 그녀에 대해 알 기회가 없었다. 연애 관련 말과 글들은 더더욱 내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데, 막상 책을 받아들고 보니 되려 규칙을 깨는듯한 묘한 희열감에 단숨에 읽었다.

이 책에는 작가가 실제로 받고 답해주었던 연애에 대한 고민들로 가득하다. 그 개별의 질문들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그 누가 읽든 분명 자신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작가 본인이 여성이기 때문에, 그리고 실제로 어떤 '여성상'을 대표하는 아이콘과도 같은 사람이 됐기에 문답은 여성들에게 조금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사실 정말로 그녀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건 오히려 남성들이기 때문에 읽으면서 도움이 되는 부분도, 조금 아픈 부분도 있었다.
 연애를 주제로 하고는 있지만 이 책에서 그녀가 일관되게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연애를 포함한,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인 태도이다. 연애라는 것이 지극히 감정적인 일이기 때문에 평소의 삶과는 조금 별개의, 예외의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말해서 짜장 짬뽕중 고르라면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고르듯이 연애와 관련한 선택에 있어서도 기본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고 그녀는 말하는듯 하다.


자신의 행복을 상대방에게 수동적으로 맡기지 말라는 데에는 깊은 공감을 했고 그것이 그녀의 태도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모든 연애와 방법론에 답이 없듯이 그녀의 카운슬링 뒤에도 몇 가지 의문점이 남았는데, 연애라는 것이 정말 온전히 나만의 의지로 결정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연애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닌 동등한 생각을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마치 모순의 관계와 같이, 만약 정말로 서로가 앞의 믿음을 갖고 있다면 과연 그 연애가 성립 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주체로 설정을 하고 나면 자연스래 그 반대편은 타자화 되고 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연애관은 자칫 잘못하면 상대방에게 소외감을 들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비롯한 많은 '주체적인' 여성들이 못난 사람들의 악질적인 안티에 시달리는 이유도 이런 부분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애에 있어 그들과 그녀들의 감정에 개입하는 요소와 변수들은 너무나도 많고 또 복합적이다. 그렇기에 곽정은의 해법이 전적으로 답이라고도 할 수 없겠지만 틀렸다고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결국엔 둘의 관계를 온전히 이해 할 길이 없다면, 적어도 '나' 와 그런 같은 고민을 하는 '우리' 들이 최소한 지켜 내야 할 것이 있다는 것. 그 지점에서부터 바깥으로 한 발씩 내딛어 보는 것이다.

올해의 가장 트렌디한 색으로 곱게 차려입은 책을 보며, 늘 같아도 낡은 사랑은 없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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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 소설가 박완서 대담집
김승희 외 지음, 호원숙 엮음 / 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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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 소설가 박완서 대담집]
호원숙 엮음


 스타 쉐프가 냉장고와 함께 등장하고, 온갖 종류의 전문가들이 스크린 속에서 열띤 토론을 하는 동안에도 소설가는 여전히 그 신비로움을 잃지 않은 몇 안되는 직업 중 하나다. 도대체 소설가라는 사람들은 어딜 가야 만나 볼 수 있을지 감이 오질 않는, 이 세상에 살짝 걸쳐있는 듯한 종족처럼 느껴진다. 온화하지만 날카롭고, 세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으면서 항상 어떤 고민을 짊어지고 살아야만 할것 같은 것이 내가 평소 생각하던 소설가의 이미지였다. 이는 내게 있어 어느정도는 동경의 대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느낌을 동시에 가져다 준다.
 부끄럽게 고백컨대 나는 고 박완서 작가의 글은 한 번도 접해보질 못했다. 신선한 구성, 유려한 문장, 짜임새 있는 이야기 등에 환호하던 나로서는 박완서 뿐만 아니라 내 이전 세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들은 섣불리 손이 가지 않았다.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쿨해보이는 책들 속에서, 구태여 수 없이 반복된 우리내 오랜 이야기를 외면해왔다. 인생의 짐이 말뚝처럼 짓눌러서 깊은 어딘가에 은둔하고 있을것만 같은 내 이전 세대의, 우리나라 작가들의 정서는 나와 어딘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내 멋대로 무지하고 폭력적으로 범주화 시켜버린 틀로 부터. 박완서는 너무나도 쉽게 깨고 나와 돌연 내 앞에 우뚝 선다. 

p19 우리나라 국민성과 나는 아무래도 안 맞는 것 같아요

 전후 맥락없이 뚝 잘라놓은 문장이지만, 이 문장을 시작으로 박완서는 내가 정형화 해놓은 기성세대 작가들의 전형과 들어맞는 구석이 사실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어딘가에 은둔하고 있다기 보다도 양지바른 조용한 동네에 햇살과 함께 놓여있는 사람같았다. 
[우리가 아끼던 사람]
 형식상으로는 대담집이지만, 11 명의 시선으로 저마다 다른 시간에 다른 방식으로 바라본 '우리가 아끼던 사람'에 대한 책이다. 부득이하게도 박완서 본인의 글을 접하기에 앞서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알게 되었지만, 오히려 소설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보다 이 대담집에서 더욱 그녀가 생생하게 잡히는 것 같다고 감히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을 통해 바라본 그녀는 여러모로 퍽이나 두드러지는 면모들을 갖고 있다. 인생의 변곡점이 꺾이고 나서야 등단해서 그 누구보다도 왕성하게, 그리고 훌륭하게 작품 활동을 해왔고, 소위 말하는 여류 작가로서의 사회적 한계도 진작에 벗어 던진듯 했다. 책중에 김승희 작가가 기술한 것 처럼 버지니아 울프에게 소개를 시켜줘야 할, 시쳇말로 신여성이었다. 저마다 다른 시선으로 조각 조각 이어붙인 상상속의 그녀의 모습은 활짝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비록 그녀를 만나보지 못했더라도, 책 표지의 사진을 보지 않았어도 책의 마지막 장에 가서는 반드시 그녀의 웃음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날 한시에 진행된 대담이 아닌 만큼, 반복되는 인터뷰 속에 몇 가지 화두가 잡힌다. 하나는 인간 박완서의 모습이고, 둘은 일사일언으로 축약되는 그녀의 소설관, 셋은 문학의 역할이다.
인간 박완서는 앞서 이야기 했듯이 정형화 된 틀에 갇히지 않고 햇살같은 웃음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다. 

p93 어쩐지 방학 맞아 시골집 내려온 여고생 같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아유 그게 말이지요’라든가, ‘뭐, 그냥’이라고 시작하는 것은 선생의 독특한 화법이다. 그러다가 웃음으로 이어지는 그 목소리는 여전했다. _ 김연수

 그리고 또한 현명한 어른이기도 하다. 뒤늦게 작가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전혀 늦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일흔, 여든은 내가 젊었을 때 내 인생 계획에 없었던 나이예요." 라고 이야길 하면서도 삶을 부지런히 아끼고 다듬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p126 칠십대의 시간이 마음에 드십니까?
뜻하지 않은 나이죠. 예정에 없었던. (웃음) 걱정도 없고 먼 계획도 없고 하루하루 편안히 가요. 예전에는 작가로서 계약도 하고 연재도 했지만 이제는 매이는 일은 안 하게 되더라고요. 어찌 보면 여벌의 삶이지만 내가 원했던 삶이 이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경제적, 육체적, 감정적으로 내가 온전히 독립했다는 자유의 느낌이 굉장히 좋습니다.

p165 노년의 내면이 깊이 있게 드러나는 대목은 말할 것도 없고 선생의 소설에서 특히 소중한 부분 중의 하나는 노년의 시선으로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대목이다. (…)
온 세상이 저애들 놀아나라고 깔아놓은 멍석인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나는 젊은이들한테 삐치려는 마음을 겨우 이렇게 다독거렸다.
젊은이의 시선에 비친 노인을 재현하는 작품은 많지만 그 반대는 드물다. 재현의 권력은 젊은이들에게 있으니까. 그런 환경에 익숙해져서일까. 가끔 우리 젊은이들은 노인들에게는 마치 내면이라는 것이 없다는 듯 행동할 때가 있다. 그런데 선생의 소설에는 통쾌한 시선의 역전이 있다.

그녀가 했던 말들은 나이듦에 대해 생각해 봄과 동시에 삶의 지침 혹은 목표가 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 책에는 박완서 작가의 맑은 모습들로 가득하다. 

p69 작가는 자기가 가진 상처가 아물기를 두려워하며 아무는 딱지를 떼어내가며 그 흐르는 피로 소설을 써 그 상처를 드러내야 한다

p38 “오랫동안 ‘누구 엄마’ 하는 식으로만 불리다가 내 이름이 생기니 이상하더라”고 그는 고백한다. 그리고 소설가가 됐다는 것은 그에게 자기 자신의 이름을 비로소 회복시켜주고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거듭나게 한 것 말고도 그의 삶의 내용을 천천히 그러나 깊숙이 바꿔놓고 있었다. 이제 삶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문학의 질료로서 살아져야 했다.
(…)
그걸 일종의 의식화라고 할 수도 있을까요? 뭐든지 챙겨서 보게 되고 무심히 사는 것이 없어지니까, 바로 그것이 사는 맛의 심화이지만 고단한 일이기도 해요. 이건 좀 신기한 일인데 문학은 지독한 곤란에 빠졌을 때 구원의 여지가 되기도 하지요. 곤란을 곧 문학으로 보상받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지요.

p174 포도주가 만들어지려면 뭐가 필요하냐. 우리는 포도, 소주, 설탕, 뭐 이런 대답을 내놓았는데 선생님의 대답은 ‘시간’이었어요. (…) 젊은 작가들, 다들 재주들은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처음부터 ‘나는 글을 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생계를 위해 하루하루를 사는 보통 사람의 생활을 체험하는 일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체험과 상상력이 행복하게 결합되어 있지 않고 상상력만 과잉되어 있는 작품들은 읽고 나면 좀 허망해요.

본인의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여러번 거듭 강조되는 그녀의 소설관은 아주 뚜렷하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상상력에만 기댄 글은 허망하다고. 그가 쓰고 싶은 글은 그 안에서 나오게 된다고. 그런 생각은 그가 겪으며 지나온 특수한 배경에서 기인한다.

p55 자전적인 이야기 중에서도 남이 단순하게 재미있어할 부분보다는 우리 세대가 그렇잖아요, 내가 원하는 무늬를 짤 수가 없었어요. 하도 바깥바람이 거세서 말이지요. 내 개인적인 것에 역사라는 것이 어떻게 불어와 내 삶을 왜곡시키는지 그런 것에 중점을 두었지 순전히 내 개인적인 것은 울궈먹을 생각이 없어요.

p35 전후의 긴 세월의 일들이 거의 기억에서 지워졌어도 전쟁기는 어제 일처럼 기억에 생생해요. 그러나 오히려 나는 6.25를 소재로 대작은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체험과 충격의 울타리에서 한 발짝도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소위 말하는 '소설을 쓴다' 라는 비아냥 거림은 그녀 앞에서 다른 의미로 쓰여야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박완서의 문학이 진정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지나간 현실을 고스란히 잘 반영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p117 “나는 쓰면서 내가 재미있지 않으면 못 쓰는걸.”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나는 왜 문학이 고통의 다른 이름이라고만 여겨왔을까. 낡은 빨랫감 쥐어짜듯 영혼을 사정없이 비틀어 짜려고만 들었을까.
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말, <친절한 복희씨>)

남이야 소설에도 효능이 있다는 걸 의심하건 비웃건 나는 나의 이야기에 옛날 우리 어머니가 당신의 이야기에 거셨던 것 같은 다양한 효능의 꿈을 걸겠다. (<나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박완서 문학앨범)

p181 그 때 스무 살 스물한 살 무렵에 힘든 시기를 겪고 남다른 경험을 하고 하면서 내가 ‘이걸 잊지 말고 기억해야겠다, 언젠가는 내가 이걸 쓰리라’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런 생각이 그 고통스러운 시절을 견디게 하는 힘과 위로가 되어준 것 같아요. 빨갱이로 몰렸다가 반동으로 몰렸다가 그러면서 부대낄 때 얼마나 이상한 일을 다 격었겠어요. 지금도 이념이라면 지긋지긋해요. 언제나 위로가 됐던 건 ‘언젠가는’이라는 생각이었죠.

p201 내 경험으로 문학은 우리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위안이 되고 힘이 돼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아주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도 활자만 보면 위안을 얻곤 했죠. 책하고 완전히 격리된 생활을 한 적도 있는데 그땐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내 문학도 남에게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살사는 사람에게도 위안이 필요하지요. 소위 팔자 좋게 잘사는 생활의 답답함이 있잖아요. 고통에만 위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안일해서 무기력해져버린 삶에도 위안이 필요하죠.

 그는 문학이 남을 위해 쓰이기 이전에 자신을 위해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문학을 비롯한 모든 작가들은 분야를 막론하고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의 효용성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렇지 않고 만들어진 작품들은 필시 어딘가 허무하기 마련이다. 소설을 쓰는 행위부터를 스스로의 안식처로 삼았으니 그가 그토록 다작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특수한 경험과 더불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어쨌든 그는 본인 스스로도, 다른 사람에게도 문학은 역할은 위안에서 찾았다. 또한 당대의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언급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근본적으로는 본인이 겪었던 것들을 기록하는 것에서 위안을 찾고자 했던 그의 성향에서 파생된 결과이다.

 두껍지 않고 술술 책장이 넘어가는 책이었지만, 한 사람의 무게가 묵직해서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의 문학에 대해서는 직접 접해보고 나서 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무엇보다 김연수, 신형철, 이병률 등 빼어난 분들의 글로 쓰여진 그에 대한 그리움이 매 페이지 마다 느껴지는 책이라서, 비록 처음이었지만 그 그리움 속에 함께 동승해서 추억하고 싶은 기분이다. 
책의 말미에 이병률 작가가 그에게 물었다. “북쪽을 생각하면 어머니가 많이 생각나세요, 아님 아버지가 많이 생각나세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의 성인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유사이래 가장 어려운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하고의 인연은 짧아서 자주 생각하고, 어머니하고의 인연은 강력해서 많이 생각한다.' 고. 

문득 이런 어머니를 두었던 호원숙 작가에게 시샘이 난다. 아마 나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마음의 어머니로 남모르게 모시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거라 생각한다. 처음 알게 된 사람을 그리워 하기는 역시 처음인것 같다.

 

 

http://dzworld.egloos.com/189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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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누운 밤 창비세계문학 39
훌리오 코르타사르 지음, 박병규 옮김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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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 현실낙하

_훌리오 꼬르따사르 [드러누운 밤], 2014 창비

[드러누운 밤] 이라는 책을 처음 알게 됐을때부터 마지막 장을 덮던 순간까지 내 머릿속을 지배하던 단어는 '환상' 이었다. 환상문학의 대가라는 카피 문구를 봤기 때문에 먼저 생긴 '이미지'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지막 장을 덮었을때 남았을 느낌은 같았으리라.

책 말미의 해설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현실과 비현실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개념이 환상이다. 즉 환상이란 현실에 기반해서 바라보는 비현실이 환상이며 이는 마치 지평선의 신기루를 보는것과도 비슷한, 감각이 일그러지는 느낌과도 같다.
그러니까, 환상 문학이라 하면 흔히 말하는 판타지 소설을, 혹은 무협지를 먼저 떠올렸던 나는 완전히 틀렸던 것이다. 판타지 소설은 그 어떤 현실도 담보하고 있지 않다.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는 난쟁이를 보면서 그 어떤 '일그러짐'도 느낄 수 없다. 해리포터의 대 성공에는 마치 9와 3/4 승강장이 실제로 어딘가에 있을것 같은, 현실을 잠시나마 왜곡시키는 환상이 적절히 조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환상은 보통 illusion과 fantasy 두 가지로 번역이 되는데, 한국에서의 관용적인 쓰임 상, fantasy보다는 illusion에 더 가까운 인상이다. 이렇게 까지 이야기 하면 낯선 개념의 소설이 아닐까 싶은데, 너무나 유명한 하루키나 파울로 코엘료의 대표작들, 김애란의 [비행운]같은 작품들이 환상문학의 특성을 일부 갖고있다. 이런 작품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체험의 단계를 비물질적인 차원으로 급격히 끌어올림으로써 현실에서 갑자기 내동댕이쳐지는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꼬르따사르의 작품들이 본격적인 환상 문학으로 불리는 이유는, 환상문학의 대표적인 특징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환상문학적인 특징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환상' 그 자체에 대단히 집착을 하고 시도했던 다양한 실험들이 각 작품마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아래는 단편중 하나인 [맞물린 공원] 초반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마치 책을 읽고있는 나에 대해 다시 3인칭으로 이야기 하는듯한 묘한 환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왼손으로 안락의자의 초록색 벨벳 천을 한두차례 쓰다듬어보는 사이에 어느덧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다.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등장인물의 이름과 이미지가 뇌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이내 소설적 환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는 한줄 한줄 읽어감에 따라 주변 현실이 산산조각 나는 야릇한 희열을 맛보고 있었다. 69p"

[드러누운 밤] 은 꼬르따사르 100주기를 기해 만들어진 단편집으로 책 제목은 수록된 단편중 한 편의 제목이다. 380 페이지의 분량에 15개의 적지 않은 수의 중단편이 수록되어있는데 뇌리에 깊이 내려 꽂히는 작품도 있었고 몰입을 못하고 훑듯이 지나쳤던 작품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꼬르따사르의 글들은 한 번 흐름을 놓치면 따라가기가 무척 힘들었는데, 짧은 문장들 여러개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큰 덩어리로 압축 되어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구성상 대부분의 작품들이 초중반에 지금 딛고 선 현실로부터 출발을 하기 때문에 그 기반을 놓치고 읽어나가다 보면 아무런 단서가 없는 후반부의 환상들에 대해서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반부가 친절한것도 아니다)하지만 흐름을 잘 따라갔던 대부분의 작품들은 앞서 이야기 했던, 마치 한 순간에 급 하강하는 놀이기구를 탄것과 같은 섬뜩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 책에 처음으로 매료됐던 부분은 작가의 눈으로 보이는 구체적인 환상들이었다. 이를테면 가장 첫 번째의 점거당한 집 에는 실타래를 묘사하는 부분이 있는데

"가끔 완성된 조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번에 풀어버렸는데, 불과 얼마 전의 모습을 잊지 못하겠다는 듯이 꼬불꼬불하니 바구니에 쌓여 있는 실이 재미있었다. (중략) 나는 뜨개바늘을 쥐고 은빛 고슴도치처럼 움직이는 이레네의 손놀림과 바닥에 놓인 바구니에서 끊임없이 요동치는 실타래를 몇시간이고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12-13p"

그의 문장을 읽고 나면 신기하게도 그냥 실타래 였던 것이 살아 움직이는, 주술적인 힘이 깃든 어떤 것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이것이 꼬르따사르의 소설 세계를 지탱해주는 가장 강력한 기저가 아닌가 싶다.

여러 이야기를 읽다보면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어느 순간부터 환상속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건 마치 사고처럼 불현듯 찾아온다. 처음엔 현실을 딛고 서있었다 생각하지만 뒤로 갈수록 어느 부분부터 비현실이었는지, 처음부터 현실이라 착각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들이 뒤섞여 혼란스럽다. 어떻게 보면 꿈을 꾸는것과도 비슷해서, 이게 꿈이었다는 것을 어떤 시점에 자각하는것과도 같다. 걔중에는 호접지몽이라는 제목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존재론적인 사유로 빠지게 만드는 작품들도 여럿이다. 그는 여러 단편에서 다양한 시점으로 존재를 조명하는데, 1인칭과 3인칭의 구분을 넘어 단숨에 시점의 도약이 이루어 지는 것은 그의 문학을 '환상적'으로 만들어주는 주요한 장치이자 그의 특기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한 흡입력을 발휘하는 부분이다.

“소모사의 이야기로는 시공간을 철폐하는 방법은 상황과 동작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렇게 집요하게 접근하다보면 언젠가는 초기 조각상과 자신이 동일해질 것인데, 이것은 중첩과 같은 이중성이 아니라 원초적인 접촉, 즉 합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79p"

“아숄로뜰의 눈은 나에게 다른 삶이 현존하며, 다르게 보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중략) 그렇지만 아숄로뜰은 우리와 가까웠다. 나는 아숄로뜰이 되기 전에 이 사실을 알았다. 내가 처음으로 아숄로뜰에게 다가간 날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의 믿음과 반대로, 원숭이의 인간적인 특성은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거리를 드러낸다. 92p"

“경이로운 꿈은 바로 그 꿈, 꿈이란 게 그러하듯이, 터무니없는 그 꿈이라는 사실을 알 고 있었다. 그 꿈에서 놀라운 도시의 이상한 거리를 돌아다녓다. 적색과 녹색 불이 있었으나 불꽃도 없었고 연기도 없었다. 다리 사이에서 붕붕거리는 커다란 금속 곤충도 있었다. 109p"

“주 3회 정오에 시로스 섬 위를 비행하는 것은, 주 3회 정오에 시로스 섬 위를 비행하는 꿈을 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이었다. 이 모두는 부질없이 반복되는 광경이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중략) 그리고 저 마을 어부들은 고개를 들고 이 비현실의 궤적을 좇고 있었을 것이다."

“즉, 조니는 천사들 가운데 있는 인간이며, 비현실 가운데 있는 (그 비현실은 우리이다) 현실이다. 299p"

“브루노, 재즈가 음악에 불과한 것이 아니듯이 나 또한 조니 카터에 불과한 것이 아니야. 322p"

쓰다보니 리뷰가 둔탁해진건 결과적으로 꼬르따사르라는 남미의 생소한 작가가 내 취향에 적절했기 때문일것이다. 더불어 지금까진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이다' 정도로 표현을 하던 것들에 환상 문학이라는 프레임으로 정리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앞서 환상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지만, 꿈의 종류가 다양하고 그 안엔 분명 어떤 실제의 원인이 되는 심리가 존재하듯이, 꼬르따사르의 작품들도 그 환상의 기저에 깔려있는 특정 주제에 대한 은유가 있다. 대부분 현대성에서 비롯된 사회적인 문제나 개인의 문제 등이 언뜻 보이지만 여기에다가는 자세히 적지 않으려 한다. 꿈, 혹은 환상은 해석없이 그 안에 들어가 즐길때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환상 문학들이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이유는 물리적인 세계에서 이격되는 경험이 본질적으로 낯설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 리뷰를 작성하는데 밴드 [OK GO]의 뮤직비디오가 나온다. 이들의 뮤직비디오는 언제나 '환상적' 이다. 비디오에서 보여지는 것이 비록 착시에 불과하더라도 여기서 환상에 대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환상은 현실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환상이라 부르는 것들은 언제나 현실의 파편들을 딛고 서있다.

그 어떤 개연성도 없이 낙하하는 현실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심리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Ps. 영화나 책 등에도 연이 있다고 생각해서 우연히 보고 접하게 되는 것들은 언제나 나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끄는 재미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평생 알지 못하고 지나쳤을 재미를 알게 해준 이번 기회에 무척 감사한다.
문장들의 호흡이나 책의 내용등을 봐선 번역하기가 꽤 까다로웠을것 같은데 특별히 어색한 부분을 찾을 수 없이 완성도 높은 번역이 환상을 환상으로써 전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글은 [창비 책읽는당]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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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립니다. ! 곳곳에 있는 알라딘을 볼때마다 늘 지나치지 못하고 보물찾는 심정으로 들어가곤 한답니다. 24주년때 다시 축하메시지 남기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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