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누운 밤 창비세계문학 39
훌리오 코르타사르 지음, 박병규 옮김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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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 현실낙하

_훌리오 꼬르따사르 [드러누운 밤], 2014 창비

[드러누운 밤] 이라는 책을 처음 알게 됐을때부터 마지막 장을 덮던 순간까지 내 머릿속을 지배하던 단어는 '환상' 이었다. 환상문학의 대가라는 카피 문구를 봤기 때문에 먼저 생긴 '이미지'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지막 장을 덮었을때 남았을 느낌은 같았으리라.

책 말미의 해설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현실과 비현실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개념이 환상이다. 즉 환상이란 현실에 기반해서 바라보는 비현실이 환상이며 이는 마치 지평선의 신기루를 보는것과도 비슷한, 감각이 일그러지는 느낌과도 같다.
그러니까, 환상 문학이라 하면 흔히 말하는 판타지 소설을, 혹은 무협지를 먼저 떠올렸던 나는 완전히 틀렸던 것이다. 판타지 소설은 그 어떤 현실도 담보하고 있지 않다.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는 난쟁이를 보면서 그 어떤 '일그러짐'도 느낄 수 없다. 해리포터의 대 성공에는 마치 9와 3/4 승강장이 실제로 어딘가에 있을것 같은, 현실을 잠시나마 왜곡시키는 환상이 적절히 조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환상은 보통 illusion과 fantasy 두 가지로 번역이 되는데, 한국에서의 관용적인 쓰임 상, fantasy보다는 illusion에 더 가까운 인상이다. 이렇게 까지 이야기 하면 낯선 개념의 소설이 아닐까 싶은데, 너무나 유명한 하루키나 파울로 코엘료의 대표작들, 김애란의 [비행운]같은 작품들이 환상문학의 특성을 일부 갖고있다. 이런 작품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체험의 단계를 비물질적인 차원으로 급격히 끌어올림으로써 현실에서 갑자기 내동댕이쳐지는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꼬르따사르의 작품들이 본격적인 환상 문학으로 불리는 이유는, 환상문학의 대표적인 특징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환상문학적인 특징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환상' 그 자체에 대단히 집착을 하고 시도했던 다양한 실험들이 각 작품마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아래는 단편중 하나인 [맞물린 공원] 초반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마치 책을 읽고있는 나에 대해 다시 3인칭으로 이야기 하는듯한 묘한 환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왼손으로 안락의자의 초록색 벨벳 천을 한두차례 쓰다듬어보는 사이에 어느덧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다.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등장인물의 이름과 이미지가 뇌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이내 소설적 환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는 한줄 한줄 읽어감에 따라 주변 현실이 산산조각 나는 야릇한 희열을 맛보고 있었다. 69p"

[드러누운 밤] 은 꼬르따사르 100주기를 기해 만들어진 단편집으로 책 제목은 수록된 단편중 한 편의 제목이다. 380 페이지의 분량에 15개의 적지 않은 수의 중단편이 수록되어있는데 뇌리에 깊이 내려 꽂히는 작품도 있었고 몰입을 못하고 훑듯이 지나쳤던 작품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꼬르따사르의 글들은 한 번 흐름을 놓치면 따라가기가 무척 힘들었는데, 짧은 문장들 여러개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큰 덩어리로 압축 되어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구성상 대부분의 작품들이 초중반에 지금 딛고 선 현실로부터 출발을 하기 때문에 그 기반을 놓치고 읽어나가다 보면 아무런 단서가 없는 후반부의 환상들에 대해서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반부가 친절한것도 아니다)하지만 흐름을 잘 따라갔던 대부분의 작품들은 앞서 이야기 했던, 마치 한 순간에 급 하강하는 놀이기구를 탄것과 같은 섬뜩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 책에 처음으로 매료됐던 부분은 작가의 눈으로 보이는 구체적인 환상들이었다. 이를테면 가장 첫 번째의 점거당한 집 에는 실타래를 묘사하는 부분이 있는데

"가끔 완성된 조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번에 풀어버렸는데, 불과 얼마 전의 모습을 잊지 못하겠다는 듯이 꼬불꼬불하니 바구니에 쌓여 있는 실이 재미있었다. (중략) 나는 뜨개바늘을 쥐고 은빛 고슴도치처럼 움직이는 이레네의 손놀림과 바닥에 놓인 바구니에서 끊임없이 요동치는 실타래를 몇시간이고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12-13p"

그의 문장을 읽고 나면 신기하게도 그냥 실타래 였던 것이 살아 움직이는, 주술적인 힘이 깃든 어떤 것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이것이 꼬르따사르의 소설 세계를 지탱해주는 가장 강력한 기저가 아닌가 싶다.

여러 이야기를 읽다보면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어느 순간부터 환상속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건 마치 사고처럼 불현듯 찾아온다. 처음엔 현실을 딛고 서있었다 생각하지만 뒤로 갈수록 어느 부분부터 비현실이었는지, 처음부터 현실이라 착각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들이 뒤섞여 혼란스럽다. 어떻게 보면 꿈을 꾸는것과도 비슷해서, 이게 꿈이었다는 것을 어떤 시점에 자각하는것과도 같다. 걔중에는 호접지몽이라는 제목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존재론적인 사유로 빠지게 만드는 작품들도 여럿이다. 그는 여러 단편에서 다양한 시점으로 존재를 조명하는데, 1인칭과 3인칭의 구분을 넘어 단숨에 시점의 도약이 이루어 지는 것은 그의 문학을 '환상적'으로 만들어주는 주요한 장치이자 그의 특기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한 흡입력을 발휘하는 부분이다.

“소모사의 이야기로는 시공간을 철폐하는 방법은 상황과 동작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렇게 집요하게 접근하다보면 언젠가는 초기 조각상과 자신이 동일해질 것인데, 이것은 중첩과 같은 이중성이 아니라 원초적인 접촉, 즉 합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79p"

“아숄로뜰의 눈은 나에게 다른 삶이 현존하며, 다르게 보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중략) 그렇지만 아숄로뜰은 우리와 가까웠다. 나는 아숄로뜰이 되기 전에 이 사실을 알았다. 내가 처음으로 아숄로뜰에게 다가간 날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의 믿음과 반대로, 원숭이의 인간적인 특성은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거리를 드러낸다. 92p"

“경이로운 꿈은 바로 그 꿈, 꿈이란 게 그러하듯이, 터무니없는 그 꿈이라는 사실을 알 고 있었다. 그 꿈에서 놀라운 도시의 이상한 거리를 돌아다녓다. 적색과 녹색 불이 있었으나 불꽃도 없었고 연기도 없었다. 다리 사이에서 붕붕거리는 커다란 금속 곤충도 있었다. 109p"

“주 3회 정오에 시로스 섬 위를 비행하는 것은, 주 3회 정오에 시로스 섬 위를 비행하는 꿈을 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이었다. 이 모두는 부질없이 반복되는 광경이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중략) 그리고 저 마을 어부들은 고개를 들고 이 비현실의 궤적을 좇고 있었을 것이다."

“즉, 조니는 천사들 가운데 있는 인간이며, 비현실 가운데 있는 (그 비현실은 우리이다) 현실이다. 299p"

“브루노, 재즈가 음악에 불과한 것이 아니듯이 나 또한 조니 카터에 불과한 것이 아니야. 322p"

쓰다보니 리뷰가 둔탁해진건 결과적으로 꼬르따사르라는 남미의 생소한 작가가 내 취향에 적절했기 때문일것이다. 더불어 지금까진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이다' 정도로 표현을 하던 것들에 환상 문학이라는 프레임으로 정리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앞서 환상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지만, 꿈의 종류가 다양하고 그 안엔 분명 어떤 실제의 원인이 되는 심리가 존재하듯이, 꼬르따사르의 작품들도 그 환상의 기저에 깔려있는 특정 주제에 대한 은유가 있다. 대부분 현대성에서 비롯된 사회적인 문제나 개인의 문제 등이 언뜻 보이지만 여기에다가는 자세히 적지 않으려 한다. 꿈, 혹은 환상은 해석없이 그 안에 들어가 즐길때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환상 문학들이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이유는 물리적인 세계에서 이격되는 경험이 본질적으로 낯설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 리뷰를 작성하는데 밴드 [OK GO]의 뮤직비디오가 나온다. 이들의 뮤직비디오는 언제나 '환상적' 이다. 비디오에서 보여지는 것이 비록 착시에 불과하더라도 여기서 환상에 대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환상은 현실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환상이라 부르는 것들은 언제나 현실의 파편들을 딛고 서있다.

그 어떤 개연성도 없이 낙하하는 현실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심리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Ps. 영화나 책 등에도 연이 있다고 생각해서 우연히 보고 접하게 되는 것들은 언제나 나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끄는 재미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평생 알지 못하고 지나쳤을 재미를 알게 해준 이번 기회에 무척 감사한다.
문장들의 호흡이나 책의 내용등을 봐선 번역하기가 꽤 까다로웠을것 같은데 특별히 어색한 부분을 찾을 수 없이 완성도 높은 번역이 환상을 환상으로써 전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글은 [창비 책읽는당]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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