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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 보았지만 읽지는 못한 명화의 재발견
전준엽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그림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우리는 그 말에 수긍과 질문으로 풍부한 대화가 시작된다. 낯설어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난감했던 경험은, 마치 그림을 막연하게 보며 일방적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전준엽의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는 숨어 있는 그림의 세계를 알려주어 그림과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 작가의 담백한 문장으로 화가의 삶을, Artist's view로 그림의 숨은 기술적 구성을, 그리고 색채와 사물, 인물 등의 다양한 소재를 통해 화가가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이 책은 분명 책이지만 글자보다 그림과의 대화 시간이 더 많아 결코 빨리 읽을 수 없었다.
그림은 그릴 수 있는 것을 그려냈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도 그려 냄으로써 본질의 모색과 끝없는 환상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낸다. 화가가 인도하는 길을 걷다보면 호기심과 긴장으로 설레며, 그 세계를 내 눈으로 대면했을 때의 떨림은 마치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같은 희열을 준다.
17세기 무렵,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린 정물화와 자화상은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아냈기에 미술사에 한 몫을 하게 된다. 값비싼 물건, 시계 등을 그려 넣음으로써 소유의 부질없음과 삶의 유한함을 나타내었고, 자화상은 삶을 관조하는 깊은 내면의 눈과 삶에 대한 반성 및 내면의 성숙함을 이루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은 세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화가가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은 보이지 않는 진실이자 상상력이 빚어낸 창조의 세계이다. 화가가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었던 진실이 가장 강렬했던 것은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1863년>이었다. 당시 알몸의 여자가 등장한 것은 혁명이라 할 정도로 획기적이었다. 마네 이전에는 여성의 누드가 신화라는 옷을 입고 있었기에 여자로 느끼지 않는다는 견해로 포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 정중하게 차려입은 두 남자 앞에서 다른 어떤 대상보다 빛나는 알몸인 채로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우리를 쳐다보고 여성을 마네는 과감하게 그려냈다. “마네가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은 회화나 신화가 역사를 재현하거나 현실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창조하는 독자적인 세계를 담아내야 한다는 스스로의 소신을 위한 것이었다.”(213쪽) 이런 마네의 이상을 아직은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상을 의미하는 새를 보일듯 말듯 작고 어둡게 표현했다. 그러나 결국 마네는 보이지 않는 진실을 그림으로 당당하게 표현해 냄으로써 시대의 흐름을 바꾸고 새로운 가치관을 세웠을 뿐더러 예술의 가치를 끌어올렸다.
세상을 향한 진실의 외침이 있었다면, 영혼을 향한 절규가 소름끼치도록 느껴진 것은 이미 대중화 된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1893년>이다. “뭉크는 자신이 혼돈 상태에서 들었던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274쪽) 괴상한 모습을 한 사람, 그림을 보는 순간 비명이 들리는 듯한 아찔함, 불안한 선들과 색들. 결코 예쁘다고 할 만한 구석이 없음에도 대중화가 된 것은 그만큼 사람들과의 공감이 형성된 이유에서다. 쉽게 또는 함부로 표현해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절박한 불안함 등을 알고 있는 화가 앞에 관객이 된 우리는 카타르시스와 위안을 얻는다. 그림은 사실을, 진실을, 그리고 철학까지 담아내어 그림과 내가, 너와 나라는 별개의 타자가 아닌 우리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며 긴밀한 대화를 나누게 한다.
예술가의 상상력은 그럴듯한 세계를 창조한다. 인간에게 가장 긴밀하지만 영원히 미지의 세계인 죽음. 아르놀트 뵈클린의 <죽음의 섬>이나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이렇게 초자연적인 세계나 관념을 그려 넣었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관념과 꿈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그림은 삶에서의 색다른 대화자가 된다. 화가, 그들이 나누고 싶었던 내밀한 이야기와 외치고 싶은 진실, 인생의 철학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색은 색으로, 향기로, 움직임으로 소리로 그렇게 그림에 모두 새겨져 있다.
이 책의 저자 전준엽은 회화를 전공했으며 도쿄, 로스앤젤래스, 뮌휀 등에서 23회의 개인전과 3백회 이상 기획전에 참가한 사람이다. 게다가 10여 년간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많은 미술작품에 대한 설명과 이야기가 솔솔 읽혀진다. 그림 하나를 이야기 하는데 역사와 그 당시의 사회배경, 화가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등 다양한 측면을 제시해 준다. 그래서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그림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안목을 열어주고 있다. ‘무릇 글 쓰는 일이나 그림 그리는 일에서 담백해지자’는 저자의 생각이 잘 스며있는 문장은 글과 그림을 더욱 빛나게 한다. 참 좋은 책을 읽은 기쁨이 충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