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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나무 ㅣ 우리시대의 논리 5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5월
평점 :
전철에서 이 책을 처음 펼치고 목차를 들여다볼 적부터 코가 시큰거렸다. 누가 지은이에게 '노동자를 왜 기름밥이라고 하는지'를 물어보았는지 소제목이 덤덤한 답변 투였는데 그걸 보고 그냥 바로 코가 시큰거렸던 것이다. 이유가 뭘까. 그 소제목엔 '언제 밥그릇에 불이 붙을지 몰라 기름밥이지요'라고 적혀있었는데, 별 것도 아닌 말에 이렇게 오랜 만에 코가 붉어지는 것일까, 당장은 떠오르지 않았던 이유가 머릿속에서 잡힐 듯 말 듯하다.
제목이 '소금꽃나무'라니, 지은이의 삶을 표현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말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난 그저 이럴 때엔 '김진숙'이라고 내놓는 것은 어떨까 생각했다. 이 책을 낸 출판사의 소개글에서도 제목 짓기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긴 했지만, 그래서 결국 '소금꽃나무'라니, 아쉽다. 혹여나 이 시대 독자들에게 감성적으로 어필하려는 속셈일까 괜히 나도 민망해진다. 그런데 굳이 나까지도 이 제목을 보고 민망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또한 계속 곱씹어보고 있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회고가 줄을 잇는 요즘, 이 책과 같이 과거 20년을 묶어내놓는 기획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런 책의 유형을 굳이 분류하자면 당시 투쟁의 현재적 의의를 조명하는 식(예를 들자니 너무나 많은 저작이 있고, 아마 경향신문이 최근 게재하는 '지식인의 죽음' 시리즈가 책으로 묶인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이거나 운동명망가들의 회고적 수기(대개 옥중 서한)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출판 관행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만들어져 거의 주기적으로 박노해, 신영복, 체 게바라를 다시 세상 밖으로 내놓았다. 이런 책들을 읽고 우리가 그나마 '하늘 위로 공중분해되려던 견고한 가치들'을 함께 이야기나눌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이런 책들의 폐해가 만만치 않아서, 운동을 단순히 과거의 실패로만 비추어 운동가들에겐 씁쓸한 열패감을, 제3자에겐 '좀 더 무거운' 가십거리로만 남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제 다시 헌책방으로 쏟아져나오는 악순환의 공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도 싶다.
이런 현실을 놓고 보면, 지은이 김진숙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아예 내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의 119페이지에 나오는, 故 김주익 열사 추도사를 현장에서 혹은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 들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의 활자들이 그 육성을 그대로 담을 수 있을까 의심할 것 같았다. 아니 나부터 괜히 아쉬웠다. 당시 그 동영상을 보며 고개를 올리고 눈을 크게 뜨면서라도 어떻게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쓰던 때를 떠올리면서, 종이 위에 활자로 타이핑된 추도사가 어떤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지레 투정이 난 것이다.
책을 펼쳐 그 부분을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 하지만 난, 어김없이 얼굴을 비벼댔다. 미안하다며 울어대는 아저씨의 이야기를 할 적부터 그저 머리를 긁적이며 도무지 추스러지지 않는 울음보를 막아보려고 애를 쓰게 되었다. 그의 추도사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당시의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 바보같이 울어버리던 표정을 잘 살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글로 쓰나 말로 하나 감동 있는 속알맹이는 그대로였던 것이다.
감동이 여전한 책이지만 그 생생한 느낌은 온전히 지은이 김진숙의 삶 자체에 빚진 바가 크다. 그 삶의 행적이 이렇게 책으로 묶여 책 어디를 펼쳐도 똑같은 내용처럼 보이는 것은 좀 안타깝다. 어디에 하소연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다. 지은이가 노동운동을 평생 해왔으니, 노동자의 권리와 사업주의 횡포 그리고 열사 추모의 내용으로만 일관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암튼 이 책 속의 몇 구절이 주는 감동으로 힘을 내어 살아갈 사람들에겐 서가에 반드시 꽂혀 있어야 할 책이 될 테니 다행이다.
이 책을 읽고 서가에서 두 권의 책을 다시 꺼낸다. 여전히 내겐 최고의 발언록이자 일기이며 최고의 시와 소설인 책들이다. 바로 야간비행에서 펴낸 <서준식 옥중서한>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사에서 매년 펴내는 <전태일문학상수상집>이다. <서준식 옥중서한>은 지은이가 살아온 감옥에서의 삶을 '연대기' 순으로 매우 정확하게 엮어놓았고 편집자의 개입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 그 무미건조함이 좋다. 단지 책의 저자와 나눈 몇 가지 합의만이 종종 눈에 띌 뿐이다. <전태일문학상수상집>은 운동이 가질 수 있는 문학성, 아니면 근대문학이 한때 가지고 있던 운동성을 매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어서 책방에 갈 적마다 기회가 되면 펼쳐보게 되고 책을 골라서 소장하고 싶은 욕심이 들게 한다.
<서준식 옥중서한>을 통해선 이런 책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감상적 수사의 난립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책의 생명을 오래 연장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만약 글의 내용이 독자들의 감정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책이라면 그 문학성을 최대한 드러내는 것이 낫다고 보는 것이다. 언뜻 '소금꽃나무'는 <전태일문학상수상집>과 같은 노동자문학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내 안에 살아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주는 책 말이다. 글의 서두부터 나는 이 책을 읽고 알 듯 모를 듯한 질문에 답변을 못 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 책 '소금꽃나무'와 같은 글을 읽은 후엔 아주 근본적인 질문에 사로 잡히게 된다. 그 질문을 피하느냐, 얼버무리느냐, 답변하느냐는 여전히 숙제로 남는 것이다.
오랜만에 책을 공들여 읽었다. 이 책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