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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감상
김지연 지음 / 선드리프레스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번아웃에 해묵은 우울에 가을타는 마음까지 더해져 유달리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티끌만한 안개도 없이 맑은 정신으로 하루를 살았던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요새 한동안 책 한 권을 끝내지 못해 반만 읽은 책들이 쌓여가고 있었는데, 새벽에 일어난 김에 붙잡은 책을 끝까지 읽었다. 김지연 작가의 책 <보통의 감상>이다. 이 작가의 글을 읽으면 지친 하루가 끝나고 포근한 이불에 감싸져 도닥여지는 감각이 든다.
p 28
“탁본을 뜨려면 우선 대상의 먼지를 깨끗이 털어야 한다. 작가는 먼지를 털고 대상을 만지면서 그 장소를 보살피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잊혔단 시간 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내면서 가만히 어루만지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 그것의 형상을 종이에 뜬다. 사진보다 더 적극적인 이 행위는, 그 안에 담긴 이야기까지 바깥으로 드러내며, 자세히 바라보고 오래도록 기억하려는 애정 어린 손길이다.”
p 56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상대를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에게 예의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알 것 같더라도 속단하지 않고 미지의 세계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이다.”
“결국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 아픔을 그대로 짊어진 채 불쑥 꺼지는 가슴의 구멍을 그때그때 적당히 메우며 살아간다.”
p 58
“일상의 사소한 고민은 누구나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만, 정작 마음 깊은 곳의 상처는 밖으로 드러내기가 어렵다. 우리는 물 속에서 숨을 참듯이 매번 아픔을 가슴속에 꾹 눌러 담고 참는다. 그러나 어떤 계기로 이야기의 실마리를 밖으로 꺼내면, 곧장 둑이 무너져 내리고 깊은 곳에서부터 거센 파도가 밀려온다. 수면 위로 올라와 참았던 숨을 내뱉듯이 상처를 드러내고 소리 내어 말하길 반복하면, 어느새 아픔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순간이 온다. 바느질이 치유를 상징한다면, 바늘로 구멍을 뚫는 행위는 이야기의 실마리가 나올 수 있도록 가슴에 숨구멍을 트는 것이다.”
p 68
“상처와 치유에 묘안은 없다. 사람을 치유로 이끄는 것은 아주 특별한 계기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감각이다. (…) 치유는 어느 날 벼락같은 행운으로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물들이며 아주 천천히 찾아온다. 겨울에서 봄으로 서서히 움직이는 계절의 감각처럼 말이다.”
p 124
“아픈 사람은 일반적인 사회의 시간과 다른 차원에 산다. 몸이 고장났다고 해서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건만, 사람들은 자꾸 아픈 사람을 잊는다. 우리 사회는 일반적이지 않은 상태에 근원적 공포를 가진 듯, 모두에게 외적으로 ‘괜찮아 보이는 상태’를 요구한다. 혹은 ‘정상’처럼 행동하길 강요한다. 아픔을 증명해야 존재가 지워지지 않는다. 그나마 배려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