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식탁 위로 - 레비-스트로스와 함께하는 기호-요리학
오선민 지음 / 북드라망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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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혼밥하신다고요? 혼자 먹으면 내 맘대로 메뉴를 정할 수 있어서 좋다는 당신. 에구 하나만 알고 하나는 모르시군요. 먹음은 관계를 먹는 일입니다. 오늘 어디 가서 누구랑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은 같이 밥 먹는 사람을 이해하고 친구를 만들어 주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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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생각한다 - 숲의 눈으로 인간을 보다
에두아르도 콘 지음, 차은정 옮김 / 사월의책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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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숲은 생각한다』을 생각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생각은 ‘나’라는 주체가 인간적인 언어와 지식을 사용하여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에두아르도 콘은 사고가 그 자체로 살아 있어서 사고가 사고를 낳고, 다른 사고로 확장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숲이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숲은 살아 있는 기호였기에 생각하는 것이 가능했다. 숲이 생각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기호라는 그 뜻을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은 1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으로 가득한데, 기호에 대해서도 그랬다. 기호가 내가 생각하는 사인이나 도안, 표시 등 그런 인간적인 기호가 아니었다. 저자는 기호는 사물 이상의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기호가 무슨 생명처럼 살아 있다니?


‘숲에서 쓰러지는 야자나무는 - 기호로 받아들여지는-성장할 수 있는 한 살아있다.’(66쪽) 즉 기호가 살아 있다는 의미에는 ‘성장할 수 있는 한’이란 조건이 붙는다. 이것은 기호가 해석체로써 해석이라는 연속적 진행 과정을 통해서 성장한다는 의미이다. 기호는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에게도 해석체로써 작용을 하여, 기호작용을 통해 무언가 점차 파악하고 행위함으로써 만물은 자기가 된다. 자기는 해석에 점차 적응하는 과정 중에 있었다. 저자는 ‘기호가 세계 속에서 “일을 한다”며, 이것이야말로 기호작용을 살아있게 만드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한다. 기호는 인간도, 쓰러지는 야자나무도 성장시킨다. 기호는 어떻게 성장시키는 일을 할까?


아마존 원주민인 루나족은 야자나무를 리드미컬하게 베기 시작할 때는 ‘타타’ 하다가, 나무가 쓰러질 때는 ‘푸오’라는 소리를 낸다고 한다. 타타나 푸오 같은 말은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행동의 이미지를 음향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인데, 저자는 언어인류학자 ‘재니스 눅콜스’의 책 제목인 『생명과 닮은 소리』를 인용하여, 이 말들이 갖는 의미를 나타내 준다. 전 세계적으로 엄마가 ‘마마’ 와 비슷하다는 말을 떠올리면 생명과 닮은 소리라는 의미가 다가온다. 이것을 저자는 퍼스의 기호에 관한 분류를 가져와 ‘아이콘’이라고 했는데 ‘아이콘’은 ‘이게 뭐야’로 들어오지 않는 무지각적이고 광범위한 신호라 할 수 있다. 아이콘은 마마처럼 말이 나타난 모습, 새처럼 입을 벌리면 밥을 주는 사람인 엄마와 닮아 있어서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 없이 즉각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나무를 벨 때 타타도 마찬가지. 타타와 푸오를 들은 원숭이에게는 기호작용으로 해석체가 될 수 있지만(후다닥 나무 위로 도망가거나 다음 행동을 개시하는), 인간에게는 아직 기호가 수신되지 않는 상태가 바로 아이콘이다. 아이콘은 음향적으로 생명과 닮은 소리, 시각적으로 사물을 그대로 표상한 모습과 닮은 것이라고 기억하자. 숲이나 우리 일상의 도처에 아이콘이 늘 있는 셈이다. 이 아이콘이 해석체가 되기 위해서는 ‘인덱스’라는 접지 과정이 필요하다.


저자는 ‘인덱스’를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추상적인 능력인 ‘상징’과 구분한다. ‘상징’ 안에는 문화적 역사적 문명적인 맥락으로 얼기설기 엮여 있어, 해석체로서의 자기에 상징이 개입할 때 자기가 아니라 맥락에 의해 지배받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해석에 대한 겹겹의 두께가 쌓여 특정한 사고방식으로 굳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사고의 식민화’인데, 저자는 “사고를 탈식민화”해야 한다며, 언어를 ‘지방화’해야 한다고, 제발 자의적 기호를 낯설게 보는 일에 도전하라고 부르짖는다. 사실 ‘마마’가 아이콘에 그치는 것은 순간이다. 다음 순간 엄마는 어떠해야 한다는 온갖 이미지와 가치관이 작동되어 엄마의 자기는 없어지고 맥락적인 엄마만 남게 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탈식민화는 ‘인덱스’라는 기호작용과 함께하며, 자기들은 인덱스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일상의 도처에서 인덱스로 접지한다는 것은 신체적이며 실재적인 관계로 직접적 연결을 타고 온다. 이것은 기호와 관련된 세계에서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인덱스에는 여러 차원의 ‘부재’가 작동하는데, 예를 들어 어떤 소리가 들려오기까지 그 소리 외의 많은 소리들을 효과적으로 모두 소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그 소리에는 미래의 표상이라는 가능성을 현재에 끌여 들인다. 인덱스가 감지되려면 해석자가 어떤 사건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또 다른 잠재적 사건을 연결해야만 한다. 원숭이는 나무 꼭대기의 움직임을 기호로서, 즉 그것이 나타내는 다른 무언가와 연결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그래서 원숭이는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다’ 인덱스는 부재하는 미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저자는 이것을 ‘구성적인 부재’라고 한다. 기호가 살아 있다는 의미는 실재적으로 현존하는 것과 부재 사이에서 계속적인 창발을 일으킨다는 의미다. 이것은 기호작용 그 스스로 불연속인 자기들에게 어떤 연속성을 가져와 자기에게 살아 있다는 활기를 주는 것 같다.


인덱스의 해석작용은 ‘열려 있음’이다. 열려 있음이 곧 활기인데, 활기는 곧 반응이다. 재규어가 사람을 보면, 그 재규어를 보는 사람이 재규어에게 그의 시선을 돌려주는 것과 같은 관계성의 표현을 동반하는 것이다. 자기를 성장시키는 기호, 활기라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것은 관계성을 사고하며 끝없는 상호작용을 하는 자기라는 의미가 아닐까? 더군다나 활기는 표현하는 것에 있었다. 물론 이것이 반드시 살아 있는 생물적 활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죽음도 관계성 안에서 시선을 돌려주는 표현의 일종이 될 수 있다. 숲은 아마존 숲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자기가 인덱스적으로 열려 있는 곳이 바로 숲이다. 인덱스의 ‘덧없음’을 상기하면서 일상을 숲처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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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의 생각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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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층 종교는 지금의 내가 잘되기 위해 믿는 종교라면 심층 종교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참나를 찾고자 하는 종교입니다.

표층 종교는 맹목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반면 심층 종교는 이해와 깨달음을 중요시합니다.

표층 종교는 경전의 문자에 매달리는 문자주의라면 심층 종교는 문자 너머에 있는 속내를 꿰뚫어 보려고 노력합니다.

표층 종교는 절대자를 나의 밖에서만 찾으려 한다면 심층 종교는 나의 밖에서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도 찾습니다.

표층 종교는 주로 내세 중심적이지만 심층 종교는 지금 여기에서 의미 있는 삶, 환희와 기쁨의 삶을 강조합니다.

표층 종교는 모든 사물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 반면 심층 종교는 모든 것이 서로서로 연결되고 의존되어 있고, 근본적으로는 하나라고 믿습니다. (132)

 

오강남 선생님의 생각을 읽으며, 교회나 절에 가지 않더라도 종교 없는 종교 생활이 가능하겠구나 하는 위안이 들었다. 나는 종교가 참 좋아 보였다. 어린 시절 엄마 따라 절에서 잠을 자고 절 밥을 얻어먹는 추억도 떠오르고, 엄마가 부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엄마를 보노라면 종교가 주는 위안은 있는 것 같다. 엄마는 자식 잘 되라고 맞춤법이 전혀 맞지 않는 글씨로 노트에 빼곡히 주문과 같은 글을 쓰다가, 본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인생의 우여곡절들이 받아들여지면서 편안해지셨다고 했다. 엄마에게 부처님은 투철한 종교 대상이 아니었던 듯 누굴 전도하거나 자식들더러 부처님을 믿으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단지 가족들의 안녕을 구할 신을 찾다가 가까이 있는 절에 다니게 되었고, 절에 다니다 보니 쉬기도 하고 가족들에 대한 부담감에 짓눌릴 때 부처님에게 떠넘기기도 하면서 힘이 생기더라고 했다. 엄마에게 부처님은 든든한 속풀이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 편안함과 안정감이 자식인 우리에게도 전해지는지 엄마가 절에 갔다 오면 그냥 좋았다. 일 년에 몇 번 가지 않아 엄마 또 언제 가냐고 묻기도 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종교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엄마 말마따나 부처님을 보고 나면 마음이 개운허지야때문이다. 누군가가 진짜 마음이 개운해지면 옆에 있는 사람도 같이 풀리고 그 사람이 말이 참말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심층 종교로 향하고 있는지는 저절로 알 수 있는 것 같다. 표층 종교인에게 볼 수 없는 내면의 변화가 있고, 이것이 전염되기 때문이다.


어느 국장님의 정년퇴임식이 생각난다. 정년을 마치는 자리에 후배들과 가족들과 직원들이 초대되는지라 보통은 30년 넘게 무탈하게 직장을 다니게 해준 배우자나 주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데, 글쎄 이분은 고마운 것도 하느님에게 고맙고, 퇴임사 내내 교회 다니라는 이야기만 해서 눈살을 찌푸린 적이 있다. 그때 종교가 참 무섭구나를 느꼈는데,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표층 종교였던 것이다. 심층 종교는 영성을 강조한다고 했다. 영성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지식이 아니라 자연지(自然智)인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지혜가 필요한 이유가 때에 맞게 말하고 처신하며 주기를 타고 변화를 도모하게 하기 때문이다. 오강남 선생님은 종교라는 것이 결국 교리나 믿음의 문제라기보다 체험과 깨달음의 문제라고 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내 앞에 있는 사람들과 체험하고 깨달은 것을 전하기 위해 종교가 영성이 지혜가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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