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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
이안 부루마 지음, 최은봉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페이지 수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굉장히 밀도 있는 역사서이다. 1853년 페리 제독의 개항에서 1964년 도쿄올림픽까지 약 100년이 넘는 일본 근대사를 개괄한다. 번역 또한 수준급이다.
다들 알다시피 일본의 개항은 미국 페리 제독의 ‘구로후네(흑선)‘ 등장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단순히 미국과의 교역을 개시한 것을 넘어, 향후 막부 체제 자체를 날려 버릴 파괴력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당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후 조슈번과 사쓰마번을 주도로 한 반막부 세력이 막부를 정복하고 근대화를 추진하는, 소위 메이지 유신에 이르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바로 ‘고쿠타이‘(국가 정체)라는 개념이다. 고쿠타이는 간략히 말하면 막부 몰락 후 천황을 절대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 체제이다. 막부 말기까지 천황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로서, 일본 관습과 정신의 영적 지도자였다. 그러던 와중, 막부가 무너지자 천황 제도는 일본 전통의 신토와 결합하였고, 천황은 곧 국가이자, 군대의 최고통수권자이며, ‘신‘으로서 추앙받게 이르렀다.
1880년 대, 성립된 이 고쿠타이는 바로 근대 일본의 아이덴티티로서 2차 세계 대전 때 미국에 패망할 때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고쿠타이는 일본의 사상가들이 독일 철학과 일본 불교에서 취사하여 발전시켰으며, 일본인 자신의 ‘소아‘를 포기하고 본인들의 존재 근원을 천황에게서 찾으라고 말한다.
근대 일본인들은 이러한 고쿠타이를 철저히 내면화시켰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난징대학살 등 일본제국군이 왜 그리도 잔인무도 했는지 추론할 수 있다. 그들은 본인들이 ‘신‘의 군대로서 ‘신‘에게 대항하는 자들을 상대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죄책감이나 부채감을 느끼지 않고, 잔학행위를 하는데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오늘날 종교적 신념에 빠진 테러리스트의 심리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론해본다.
이러한 고쿠타이는 일본 제국이 미국에게 원자폭탄 2방을 맞고도 항복을 망설이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패망 후 미군에게 지배받을 때도 일본 우익들은 이 고쿠타이를 지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여러 선택지가 있었겠지만 연합군 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은 천황제를 유지하고, 천황을 전범 재판에 세우지 않기로 하는 결정을 한다. 저자 이안 부루마는 맥아더가 천황을 전범 재판에 세우지 않은 사실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고쿠타이 아래 모든 의사결정은 천황을 비켜나갈 수 없기 때문에, 일본 제국의 모든 잘못을 군국주의자들에게만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책임자인 천황이 무죄라면, 군국주의자를 제외한 모든 일본인은 똑같이 무죄이며, 또한 희생자라는 논리가 가능하다. 더군다나 원자폭탄 2방을 맞았는데 말이다. 오늘날 일본 우익의 논리가 여기서 파생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근현대사로 일본과 날을 세우는 대한민국의 사람으로서 착잡한 심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고쿠타이를 중심으로 감상문을 썼지만, 이 외에도 1920년 대 문화, 정치적으로 융성했던 다이쇼 시대에서 1930년 대 의회가 무너지고 권력이 왕정과 군대로 넘어가 군국주의로 전개되는 과정, 전시에 종잡을 수 없는 의사결정 체제, 현 일본 아베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등 더 쓰고 싶은 내용이 많다. 앞서 말했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페이지 수의 책이지만 상당히 밀도가 높다. 일본 근대사에 알고 싶다면 꼭 읽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