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에스키모인들에겐 늑대를 잡는 전통 방법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한 겨울 눈밭을 헤매는 굶주린 늑대를 잡는 방법이다.


그들은 날카로운 칼날에 피를 묻힌 후 얼린다.

얼린 칼의 자루를 밑으로, 피묻은 칼날을 위로 하여 눈속에 단단히 꼽아놓으면,

이윽고 피냄새를 맡은 배고픈 늑대가 나타난다.


주위를 경계한 늑대는 피로 얼어붙은 칼날을 핡기 시작한다.

아무도 없다.

칼날은 녹고 늑대의 혀는 잘려나가고,

얼어서 감각이 없어진 그놈은 계속 칼날을 핥아대고 그의 혀에서는 피가 흐른다.

자기의 피를 먹다가,

결국 혀는 갈갈이 갈라지고 마지막 피를  핥으며 늑대는 죽는다.

 

이 장면은 어느 종교에서 인간이 죄를 탐하다가 결국 자멸한다는 예화로 나온 것이었다.


나는 분노했다. 

죽어가는 늑대의 모습에서 예화가 말하고자 하는 죄지은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그런 짓. 그런 방법. 그런 식으로 누구를 죽이는 것, 

그런 장면을 지켜본다는 것은 인간이 해서는 안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확히 이런 지점에서 사람들은 갈리게 된다.

그게 뭐가 어떤데, 그럼 늑대가 가축들을 잡아먹게 두는 게 옳단 말이야? 

아니 이건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현명하군, 힘 안들이고. 위험하지도 않고. 

아니긴 뭐가 아냐? 그럼 다른  방법을 말해봐.


이런 경우 대화는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차이' '다름'을 넘어서 전혀 다른 사람이었음을 느낄 뿐이다.

같은 사람인줄 알고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이상해서 보니 그 사람의 그림자가 없더라는 식으로 놀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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