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뉴 큐레이터 - 건축과 디자인을 전시하기
플러 왓슨 지음, 김상규 옮김, 정다영 감수 / 안그라픽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말그대로 ’큐레이터 희열(curatoria euphoria)‘의 시대다. 일상 속에서 큐레이팅 아닌 것을 찾기 어려워진 우리의 현실이 증거한다. 그에 비해 새로운 비평적 관점을 열어가는 소규모의 움직임들이 특히나 코로나 이후로 더 만나 보기 힘들어졌다고 느낀다.

전시가 마케팅 수단이나 소비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무언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나로서는 어딘가 변방의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마음을 혼자 앓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정답을 정해두고 그걸 재현하는 전시가 아니라 재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시를 꿈꾸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읽게 된 『뉴 큐레이터』에서 베아트리체는 ’질문할 권리가 있고 그 답을 모를 수도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호주의 상황과 베니스비엔날레의 사례가 중점적으로 다뤄짐에도 이 책은 전시, 디자인, 건축에 대해 한국에서 계속 고심하고 논의해야 마땅한 일종의 ‘가능성’을 전망한다. 이에 더해 섬세한 번역과 각주, 역자후기를 포함한... 정말 품 많이 든 책이라는 게 느껴졌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번역하셨다는 이 씁쓸하고도 멋진, 우려하면서도 대담한 책을 많은 사람들이 들척이고 알아보면 좋겠다.

아래에는 책을 읽으며 수집하고 재구성한 ‘뉴 큐레이터’의 전시론을 적어봤다.

•백과사전식으로 수집한 작품, 아카이브에 권위와 애착(fetishisation)을 부여하는 방식의 전시가 아니라, ‘잠재적 위험성’을 전시 자체에 반영하는 전시.
•‘연구와 제작 결과’ 전시가 아닌 ‘시작점이자 촉매제’로 작용하는 전시.
•‘스냅숏(snapshot)’으로서의 역사관을 따르지 않으며, 중첩적이고 교차적인 맥락 속에서 ‘추모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전시. 그리하여 ‘두 세대, 세 세대를 넘어서 먼 장래까지 생각’하는 ‘거시적 감각’을 촉진하는 전시.
•큐레이터가 ‘대상’과 ‘대상의 맥락과 생산방식’, ‘대상자체가 지닌 힘’에 대한 삼중의 책임감을 느끼는 전시. 즉, 대상이 지닌 ‘시적인 본성’을 번역하고 매개하는 전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향수 수집가의 향조 노트 - 108가지 향조, 189가지 향수의 향을 경험하다 경험들 시리즈 1
ISP 지음 / 파이퍼프레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선천적으로 그리 향에 민감한 편은 아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우연히 들어갔던 향수 매장에서 향을 설명해놓은 글을 읽고 새로운 감각이 일깨워지는 듯한 경험을 했다. 이후 향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향을 묘사한 글을 읽는 것을 즐긴다. 향수보다도 향에 대한 설명을 읽고싶어서 향수 브랜드 계정을 팔로우할 정도이니까.

비유적이고 시적인 표현을 통해 향을 연상하게 만드는 글이 있는 반면, <향수 수집가의 향조 노트>의 저자는 보다 더 명료하게 향을 설명하고, 향조 추출 방식을 매우 자세히 서술한다. 덕분에 책을 다 읽고 나면 향수 뒷면에 암호같이 써있던 노트들을 내 나름대로 해석하고 꽤나 구체적으로 향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다. 그럼에도 글 곳곳에서 은유의 문장들이 발산하는 신비로운 향취를 음미하는 재미도 있다.

무엇보다도 책에서 여러 차례 강조하듯, 많은 향조의 원료들을 자연에 빚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내주었는지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현존하는 다양한 향들을 누리면서도 어떻게 자연에 해를 끼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을지 충분히 모색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사려깊은 책이다.

이야기에 서론-본론-결론이 있듯이 향수에도 탑-미들-베이스 노트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향수가 가진 향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향유가능한 하나의 이야기로 접근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앞으로 살아가며 또 어떤 이야기들을 맥이 뛰는 자리에 새로이 얹게 될까, 그 잔향은 어떨까 상상하게 된다.

책을 후루룩 넘겨본다. 약한 바람이 인다. 미지의 미래로부터, 날 오래도록 기다려온 잔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운 날이면 그림을 그렸다
나태주 지음, 임동식 그림 / 열림원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뭔가에 이끌려 혼자 임동식 작가의 전시를 봤던 날을 잊지 못한다. 그곳에서 보고 나온 세계는 내가 처음 보는 세계였고 일체와 화합의 세계였다. 평생 경험해보지도, 보지도, 속하지도 않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원하고 있던 세계. 그런 세계를 바로 그가 눈 앞에서 만들어내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를 '자연미술가', '대지미술가'라 하였고 '행위예술가'라고도 하였으며 나태주 시인은 '철학가'라고도 한다.

어느 방향에서 본 나무가 좋으냐는 물음에 "다~ 좋은걸."하고 답하는 친구의 말을 듣고, 그 나무를 둘러싼 여덟 방향을 담은 연작을 그린 화가. 그의 그림을 보고있으면 그것은 '자연미술'이라기보단 '자연' 그 자체로 보인다. 나태주 시인의 헌사와 같은 시들을 그림과 같이 감상하고 나니, 그것은 임동식의 삶이 곧 그의 그림이자, 자연이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됐다.

시에서 '그냥'이라는 단어를 읽을 때마다 너무 알맞은 단어라는 생각에 몇 번이고 놀랐다. 그의 그림을 이야기할 때 (지금 나처럼) 수사를 덧붙이는 일은 꽤나 어리석어 보인다. 우리가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린 우리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너무 많은 수식어와 이것 저것들을 무겁게 달고 사는 것은 아닐까?

시집을 읽는 동안만큼은 그냥 좋고, 그냥 기쁘고, 그냥 그리울 수 있었다. 그냥 본질. 딱 이 두 단어로 설명되는 삶. 나도 그런 삶을 살고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일의 가능성 - 나에게로 돌아오는 그림 독서 여정
조민진 지음 / 아트북스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부터 '마음을 잘 주는' 사람들을 동경해왔다. 이는 '많이 받고 자랄' 천성을 타고났기에 그런걸까. 실로 마음을 표현하는 일엔 늘 부족함을 느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변인들의 안부를 묻는 일마저 서툴렀을 정도니까. 그럼에도 나는 그들의 애정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났고 여전히 표현의 방법을 터득해나가는 중이다.

책을 읽으면서, 예술 감상에 내가 애착을 갖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알게됐다. 예술가들은 자신과 세상에 대한 온갖 생각들을 응축해 작품으로 제시한다. 잘 받는 것 하나는 자신있었던 나는 줄곧 그들의 '마음'을 흡수해왔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전체가 하나의 헌사같았다. 아주 정성스러운 형태의 헌사.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경험들, 그리고 그 안의 미술작품, 책, 드라마, 영화들에 대한 애정 어린 인식과 감사. 살아가며 잊어서는 안될 이 귀중한 마음을 작가는 섬세히 엮인 이야기로 독자에게 다시 건넨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나도 인생에서 내가 받은 것들에 대해 이리도 아름다운 헌사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와 동시에, 어쩌면 우리는 끈질긴 생으로 매일이고 온 힘을 다해 헌사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이 남긴 생각들로 인해 나의 일상이 오월의 온기를 머금어 더욱 향긋해져간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림의 방 - 나를 기다리는 미술
이은화 지음 / 아트북스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술은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이라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내 삶이 나의 예술이고, 내 예술이 곧 나의 삶이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p.63)


실제로 나에게 예술은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일부인 동시에 나를 그로부터 탈주하도록 하는 촉매이기도 하다. 결국 예술을 가까이한다는 것의 의미는, '일상적 삶으로부터의 탈주를 일상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방'의 개념도 그러하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 했듯, 방은 온전히 일상적인 생활 공간이면서도 때때로 가장 급진적인 상상을 유도하며 그를 실현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제목인 '그림의 방'은 두 세계를 모두 포용하는 커다란 단어가 된다.


성찰 없는 일상과 실천 없는 성찰의 허구성을 아는 이들만이 예술가가 되는 듯하다. 그들이 살아가는 동안 치열하게 피워낸 세계가 책 속에 한가득 만개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