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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피다 ㅣ Nobless Club 14
이헌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시간은 피다: 노블레스 클럽 014>
저자: 이헌
쪽수: 368쪽
가격: 11000원
출판사: 로크미디어
초판1쇄: 2009년 6월 25일
0. 굶주림이란 요소가 소재가 되는 글이란 꽤 존재하는 편이다. 이상하게도 내 기억 속에서 굶주림이란 요소가 크게 작용하는 글은 단 하나의 예외(폴 오스터. 공교롭게도 그가 쓴 <폐허의 도시>도 이 글도 비슷한 감성을 전달하고 있다. 피할 수 없는 환경에 굶주림, 삶에 대한 투쟁과 같은 부분들이 특히. 글의 방향성은 다르지만)를 제외한다면 대개 러시아 소설이었는데 이제 와선 그 이유를 정확히 들진 못하겠지만 아마도 그 만큼 인상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시간은 피다> 역시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어쩌면 러시아(구 소련)라는 나라 자체가 굶주림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쉬운 환경인 것일 지도 모르겠다.
냉(한)대기후이기 때문에? 아니면 그럴 만한 역사적 굴곡 때문에?
1. 이 글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레닌그라드 포위로 인해 벌어졌던, 도시 내의 기아에 대한 이야기다. 정말 지독하다 싶을 만큼 굶주림에 대한 절절한 묘사가 적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굶주림이 단지 배고픔에 대한 추상적인 설명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예시과 표현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기아를 단순히 기아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것이 소설에는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다수의 소설에서는 이것이 부족한 편인데 왜냐하면 작가가 자신이 해야 할 말에 치우쳐서(정확히는 그러한 암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생존물이지만 단지 삶을 영위하기 위한 발악만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발레와 존엄성의 문제 역시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2. 먼저 얘기해두자면 이 글은 굉장히 잘 쓴 편이다. 노블레스 클럽에서 나온 장편 중에서는 첫 번째 내지는 두 번째로 훌륭하다. <피리새>를 제외한 다른 글을 다 읽어보았지만 전체적으로 이만한 글은 하나를 더 꼽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 정도의 내용이라면 다음 글도 기대해 볼 만하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굉장히 진중한 내용이었고 그 만큼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소설이었다. 덕분에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다. 여는 이 책을 읽을 때 온전히 몰입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 글의 가치 외적인 면이며 밀려 있는 일로 인해(이것도 굉장히 절박했으니까) 책을 읽으면서도 일에 대한 초조함이 앞섰던 것이다.
3. 이 글에서 발레는 책의 소개에도 나오듯 큰 비중을 가진 소재로 활용된다. 발레는 단순히 발레일 뿐만 아니라 삶의 의미이기도 하고 꿈이기도 하고 희망이기도 한 무엇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 글에는 발레와 관련된 일화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실제로 세어보진 않았다) 그것들이 요소요소에 잘 배치되어 있어서 길게 늘어지는 설명이란 느낌을 거의 받지 못했다. 그러나 발레는 결국 소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후반부에 드러난다.
4. 하나의 이야기가 한 권으로 어느 정도 마무리 지어졌다는 점도 이해해 줄 수 있을 법하다. 온전한 끝은 아니라고 보지만, 앞서 나왔던 <인드라의 그물>이나 <일곱 번째 달의 무르무르>에 비해 훨씬 나은 형태의 결말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이 글의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모든 단점을 과정이 완벽히 덮어줄 것이라고 본다..
-아래는 글 내적인 부분들에 대한 감상입니다-
5. 독자가 '자신을 위한 글'이라 느낄 수 있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떤 글은 일생에 걸쳐 영향을 줄 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해 대다수의 글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고(주관적이지만) 따라서 내게도 이 글이 가지는 장단점이 보일 수밖에 없다.
6. 도입부가 좀 어색하다. 끝까지 다 읽어본 시점에서 말하자면 도입부의 설명은 아마도 필요한 것 같다. 이 부분은 작가도 굉장히 고민했을 것이다. 분명히 처음에 짚고 넘어가는 편이 좋은데 이것을 능숙하게 처리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괜히 이 부분을 길게 늘여 쓰자니 도입부가 아니게 된다. 이 책의 경우에는 이왕 피할 수 없는 지뢰를 최대한 빨리 넘기기 위해 딱 필요한 부분만 서술하고 재빨리 본문으로 넘어갔다. 이 글에서 유일하게 환상적인 장치야 말로 바로 이것인데 이 부분을 먼저 설명하지 않으면 내용을 전개해 나가면서 굉장한 부담을 안게 된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보다 세련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인가.
7. 이 글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 중 하나는 스물세 번째 단락에 해당하는 173-204쪽일 것이다. 이 부분은 조금 과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세 번째 만남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극적인 효과를 주고 싶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는데 지루하다기 보다는 부담스러웠다.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달리 튀어 나오는 곳이다. 물론, 작가의 욕심이라고 할 수도 있고 충분히 이해하고 읽을 수도 있다. 이 부분은 아마 금방 고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운명적인 재회에 해당하는 장면이다. 이 글 자체가 결국 운명적인 만남을 다루는 것이기도 하고, 글쎄, 이런 내용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꽤 멋진 이야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조금 참혹하긴 하지만 우리는 이럴 때 곧잘 사용하는 단어인 '비장미'를 내세우면 되겠다.
8. 마지막 부분도 꽤 개연성있는 결말을 지었다고 보지만, 속편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속편이 나온다면 글의 성격이 조금 달라질 지도 모르기에(물론 우려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이대로도 좋다.
9. 발레리나 뿐 아니라 작가 역시 그의 노력이 티나는 걸 자랑으로 삼을 순 없다. 따라서 그 부분에 대한 칭찬은 넘어가기로 하겠다. 아주 모범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이미 칭찬인가) 그걸 굳이 입밖에 내지 않아도 독자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덧1: 결말에 나오는 그 설정을 응용하게 되면 '무한 증식'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전개는 무조건 아웃이지만.
덧2: 예브게니의 마지막 선택은 이해하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