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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평점 :
행운동의 택배기사인 주인공.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행운이라고 부르라는 남자의 이야기다. 하지만 남자에 관한 것은 무엇하나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고 소설의 끝까지 나오진 않는다. 단지 알게되는 건 그가 숙소 제공이라는 말에 택배를 시작했다는 것과, 알콜중독자마냥 술을 좋아한다는 것, 사람을 상대하거나 어울리는 걸 내켜하지 않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요상한 능력이 있다는 것 정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을 만나는 사람마다 관상 감별사처럼 괜찮은 사람이란 걸 알아봤다고 해서 웃겼는데, 초반부에 대체 어떻게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안다는 거지?라는 의문은 뒤로 갈수록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자신의 삶에 들어오는 걸 쉽게 허락하지 않는 만큼, 타인에게도 선을 지킨다. 먼저 물지 않으면 물지 않고, 명령을 하면 반항을 한다고 하며, 괜한 시비는 갖가지 논리로 격파하지만 부탁을 하면 들어준다. 그런 주인공의 신념이 담긴 툭툭 터지는 블랙코미디같은 말이 굉장히 재밌었다. 주인공의 성격이 시크하고 웃긴데, 주된 이유가 입과 마음이 따로 놀아서인 것 같다. 입으론 도리를 찾으면서도 나중에 분명 후회하겠지라고 생각하고 혹은 그 반대로 말하면서 생각하는 모습이 솔직하면서도 매력적이었다.
고객님 자본주의 논리를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 자본주의 논리로 해보죠. 이 택배 배송비가 천백원이에요. 아침에 분류하는 노동비, 배송 노동비, 차량유지비, 유류대, 보험료, 전화비, 클레임과 분실 비용, 제 이윤 등을 빼고 나면 여유분은 아예 없거나 많으면 일 원이나 이 원이 남을지 몰라요. 택배 하나당 말이죠. 그럼 설명 좀 해주세요. 도대체 일 원이나 이 원의 서비스가 어떤 것인지. 케인즈 관점의 거시경제학으로? 아님, 하이에크의 영향을 받은 신자유주의의 논리로? - 79p
소설을 보면서 주인공의 말빨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기본적으론 과묵하지만 도리에 맞지 않은 말은 하지 않고 툭툭 던지는 블랙코미디에 웃은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본인은 자신의 말에 웃는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웃긴 건 웃긴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의 분위기가 웃기기만 한 건 아니었다. 우울증에 걸려 담배를 요구하고 주인공을 죽이려 했다 말할때는 언제고 백만원을 줄테니 일주일에 하루는 자신을 만나달라는 여자, 동네 바보지만 뒤에 보디가드를 달고있는 남자, 갑자기 경제학 강의를 해주겠다며 찾아오라는 노교수와 알쏭달쏭한 말을 늘어놓는 노교수의 손녀, 꼭 토요일 저녁 8시에만 배송을 해달라는 게이바 등의 인물들은 택배기사인 주인공과 얽혀 각자의 삶의 무게들을 보여준다. 게다가 주인공의 직업, 택배 기사들의 애환을 담은 에피소드들도 있어서 정말 엮이는 사람들이 가지각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피소드 몇몇은 화가나기도 하고 기가차서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일에서 배운 게 있다면 버나드 쇼의 말이 맞다는 거다.
돼지와 뒹굴어서는 안 된다는 것. 함께 더러워질 뿐이고, 심지어 돼지가 그걸 좋아한다는 사실. - 70p
뒤 쪽의 에피소드에선 적당히 긴장감도 느껴지고, 거물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며 대체 주인공의 정체가 뭘까 몹시 궁금했었다. 몸쓰는데 무리가 없는것 같은데 설마 살인자는 아니겠지하는 생각도 했다. 추리, 미스터리, 하드보일드 소설이라고 해서 했던 생각인데.. 정체는 주인공의 말빨처럼 시원스럽지 않았다. 과거의 이야기를 단편으로 조금만 줬어도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어쨌든 주인공의 위로 같지 않은 위로는 요상한 힘이 있었다. 인생에 달관한 듯 말하며 하루 벌어 하루의 술을 책을 함께 읽으며 마시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맺고 끊음을 잘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어딘가 모르게 통쾌함까지 느껴졌다. 어쩌면 제목의 '침입자들'이라는 뜻은 개인의 삶에 간섭하고 상처주는 사람들 모두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 주인공이 침입자들을 피해 언제까지 떠돌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들려주었던 화려한 말솜씨와 진솔한 말들은 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사회는 집념, 포기하지 않는 노력, 뭐 그런 걸 강요하지만 글쎄요, 제 생각엔 희망이란 게 사람에게 힘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괴롭히기만 할 뿐인 것 같아요. 그럴 땐 포기하면 편하죠. 정말 그래야 할 일은 살면서 한두 가지 정도인 것 같아요. 대개의 일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도망갈 수 있다면 도망가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이라는 뜻이니까. - 189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