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 박람강기 프로젝트 11
사라 파레츠키 지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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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범죄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하나같이 팜므파탈 아니면, 살해당하는 피해자일까?


사라 파레츠키가 이런 의문을 가진 건 열아홉 살 무렵의 일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빅슬립>을 읽고 기함했다는군요. <빅슬립>에서 카멘 스턴우드는 주변의 남자들을 성적인 유혹으로 부패시키는 팜므파탈로 등장하지요.


“범죄소설에서는 여성들이 범죄를 사주하려고 자기 몸을 이용했어요. 아니면 피해자였죠. 사악하지 않은 여성은 누군가의 가르침이 없으면 신발 끈조차 묶을 수 없는 캐릭터로 등장하더군요. 이 모든 요소를 사용한 최초의 책은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였습니다. 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남자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범죄를 저지르게 했던 브리지드 오쇼네지는 범죄소설에서 모든 여성 캐릭터의 모델처럼 되었지요.”


사라 파레츠키는 레이먼드 챈들러와 대실 해밋의 여성 묘사에 화가 나서, 소설과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범죄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파레츠키가 이야기를 구상한 시점부터 첫 번째 소설을 쓸 때까지는 대략 8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는데, 그 기간 동안 보험 마케팅 매니저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고 합니다.


여성을 향한 끔찍한 폭력, 여성에게 고통을 주려는 욕망을 자각하며 싸워야 하는 캐릭터, 세상과 단절되었다고 느끼던 여성들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립탐정 V. I. 워쇼스키가 태어난 것은 1982년입니다. 몇 년 후 한국에서는 <여형사 워쇼스키>라는 제목으로 출시되었는데, 비디오대여점깨나 들락거렸다면 기억하시겠죠. 캐서린 터너가 주연을 맡았던 바로 그 영화.


파레츠키가 단지 소설만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건 아닙니다. 1988년에는 미스터리와 범죄소설을 쓰(려)는 여성들을 지원하는 조직인 ‘시스터스 인 크라임’을 설립하여 자신이 꿈꾸었던 사회적 변화를 일으켰지요. 작가가 되는 건 남성만의 영역처럼 보였던 시절, 당연하다는 듯 차별적 대우를 받았던 여성 작가들에게 시스터스 인 크라임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2019년 4월 25일. 뉴욕에서 열린 에드거 앨런 포 시상식에서 사라 파레츠키는 19번째 워쇼스키 시리즈인 <쉘 게임>으로 수 그래프턴 기념상을 수상합니다. 이 소식은 ‘미국 미스터리 작가 협회가 사라 파레츠키를 예우하다’라는 제목으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으니 이건 역시 시대의 변화라고 할까요.


수 그래프턴과 사라 파레츠키는 서로를 알지 못한 상태로 같은 해에 나란히 전례가 없는 강한 여성 탐정을 각자의 작품에 등장시켰다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그래프턴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만든 상의 첫 번째 수상자로 파레츠키가 선정된 것은 뜻 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파레츠키가 가정에서 폭압당하는 아이였을 때부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까지의 여정, 남성 중심의 문학계에서 글을 쓴다는 것의 어려움에 관해 서술한 책 <침묵의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이 출간되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가디언>과 했던 인터뷰에서 작가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말하기의 필요성으로 귀결됩니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을 위한 말하기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죠. 예컨대 한 여성이 게임에 강간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 1만 명의 사람들이 그녀를 강간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이게 바로 워쇼스키가 떠나지 않는 이유예요. 나처럼 나이든 여자에게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 느낍니다”라고.


저도 우연히 <가디언>에 실린 인터뷰를 흥미롭게 읽고 원서를 검토하다가 <침묵의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 Writing in an Age of Silence>을 만들게 되었는데 챈들러나 해밋 같은 작가들에 대한 뒷담화가 잔뜩 나오니까 역시 재미있습니다. 편집자 후기에는 ‘시스터스 인 크라임’의 탄생부터 최근까지의 활약에 대해 적어보았습니다. 시간 나실 때 슬슬 거들떠봐 주시길.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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