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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보지 말 것 - 미니어처 왕국 훔쳐보기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 그늘 / 2025년 6월
평점 :
쓰네카와 고타로라는 이름은 이번에 처음 접했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책을 펼쳤고, 그 덕분에 더 짜릿한 독서 경험을 하게 됐다. 첫 챕터는 흥미진진한 판타지 이야기처럼 시작되지만, 곧바로 전혀 다른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단편집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전혀 다른 줄 알았던 이야기들 속 인물들이 서로 얽혀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그 순간 소름이 돋았다. 각각의 단편은 따로 노는 듯하면서도 같은 세계관 속에서 정교하게 연결되어 결국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완성된다. 무서우리만치 치밀한 설계다.
첫 번째 이야기인 「상자 속 왕국」은 전체 이야기에 대한 열쇠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엄마가 실종된 그날, 소년 ‘우치노’는 흙더미에 떠밀려온 나무 상자를 줍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미니어처 왕국을 발견한다. 작은 세계 안에는 숲과 마을, 성, 사람들, 심지어 용과 흡혈귀까지 있다. 실제처럼 살아 숨 쉬는, 아주 정교한 또 하나의 세계다.
이 설정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데, 이후 단편들에 등장하는 소재는 더 놀랍다. 시간을 앞당기는 은시계, 공간 전체가 멈춰버리는 사건, 외형을 바꾸는 AI 로봇, 불사의 약, 제한 시간 동안만 작동하는 초강력 접착제 등. 각각의 요소들이 흥미롭고, 이야기는 수년, 수십 년, 때론 수백 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시원하게 전개된다. 그 속에서 인물들은 도전하고, 성공하고, 또 실패한다.
나는 소설이라는 매체를 좋아한다.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무한한지를 느낄 수 있고, 영화처럼 시각적으로 정답을 강요받지 않고 텍스트만으로도 얼마든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 담긴 설정들은 어릴 적 한 번쯤 상상해봤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상상력이 메말라가는 지금, 이런 이야기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작가의 기발함과, 단편들을 치밀하게 엮어 긴장감을 유지하는 솜씨는 정말 놀랍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강하게 와닿았던 건 ‘시간’이라는 감각이었다. 하루이틀이 아닌 몇십 년 단위의 서사 속에서 인물들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선택이 만들어내는 결과와 후회는 오랜 시간에 걸쳐 다가오고,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지금 내 인생의 ‘주인공’처럼 살고 있는가? 결국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일일 것이다.
책 속 한 대사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조모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자주 해주셨어요. ‘네가 이야기 속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마렴. 분명히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그런 마음으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렴’이라고요.” 젊음은 언젠가 끝난다. 젊었을 때조차 떠나보지 못했다면, 나이 들어서는 과연 가능할까?
뒤틀린 판타지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며 완성되는 이 단편집은 단순한 상상력의 향연을 넘어, 깊은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올해 읽은 책들 가운데 단연 가장 추천하고 싶은 소설. 이 이야기를, 당신도 지금 열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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