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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언트 포에버 - 어떤 언어든 빨리 배우고 잊지 않는 법
게이브리얼 와이너 지음, 강주헌 옮김 / 민음사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버킷리스트'라는 단어를 썩 좋아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죽기 전에 경험해고픈 일이 몇 가지 있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에는 '여러 나라의 도시들에서 살아보기'가 그 중 하나이고, 특히 독일의 베를린에 가장 애착이 간다. 전통과 장인정신이 존중받는 곳, 합리적인 국민성, 무엇보다도 잘못된 과거사를 끊임없이 반성하며 기억하는 태도 때문이다. '언젠가는 베를린에서 살고 말 것이고 잘 살기 위해선 독일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단순한 사고 하나로 초급 독일어 교양 수업을 듣기도 했다. 비록 명사에 성(姓)이 세 개나 된다는 듣도 보도 못한 언어체계에 바로 겁먹기는 했지만. 수업을 두 번이나 수강했지만 학기 중에만 공부를 해서인지 여전히 관사변화표를 옆에 두지 않고는 한 문장도 완성할 수 없었다.

  저자는 오페라 가수라는 직업상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 다양한 언어를 단기간에 자연스럽게 발음해야 했다. 책에는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경험한 그의 모든 시행착오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곧 그가 터득한, '외국어를 더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는 멋진 도구'를 통해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전수하는 가이드북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실천이 따르는 모든 책이 그렇듯이, 이 책 또한 독자들의 행동이 없다면 공허할 뿐이다. 그러나 저자는 외국어 공부에 있어서 '효율'을 따질 뿐만 아니라 '재미'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플래시 카드, 금지 놀이, 연상 기억법, 모국어 화자들과의 적극적인 상호교환 수단 들을 소개한다. 

  저자의 공부법의 핵심이 되는 도구는 바로 '플래시 카드'이다. 간단히 말하면, 앞면엔 공부하는 언어의 단어를 적고, 뒤에는 뜻풀이를 적는 것이다. (앞, 뒷면의 순서가 바뀔 수도 있고 단어 대신 문장이 올 수도 있고, 그림이 곁들여지기도 한다.) 이 플래시 카드를 이용해 SRS(간격반복시스템, Spaced Repetition System)을 활용하면 벌써 절반은 따라한 것이다. 간격 반복 시스템이라는 단어가 얼핏 어렵게 들리지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해서 기억할수록' 더 효율이 높아지는 우리의 기억력 체계를 확실히 이해하는 데에 바탕을 둔 단순한 학습법이다.

     '게으름'은 '효율성'의 또 다른 이름이다. (52p.)

 

  책의 초반부터 저자는 몇몇 근거를 들어 '과잉학습'을 지양하고 나선다. (인용한 저 문장을 읽고 나서 얼마나 용기가 났던지!) 매일매일 배웠던 모든 단어들을 반복해서 암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뇌가 잘 기억하는 단어들은 미루고 그렇지 않은 단어들은 더 자주 노출함으로써 언어 학습이 '나'의 수준으로 맞춰진다. "언어 학습은 씨름이 아니라 교감이다"라는 가치관 아래, 저자는 '나'와 '내가 공부하는 언어' 사이의 개별적 기억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과의 추억이 유독 기억에 남듯이, 언어라는 것도 어떤 기억을 매개로 해서 교감하느냐에 따라 나의 머릿속에 오래 새겨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저자는 간격 반복 시스템이라는 '기계적' 체계와 플래시 카드라는 '나에게 의미 있는 기억' 체계를 합함으로써 뇌의 화학작용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는 학습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을 끝낸 나는, 저자가 정리한 사용 빈도가 높은 단어 625개를 독일어로 찾아 플래시 카드를 만들고, 한 달 전쯤 결제했던 회화 위주의 가벼운 인터넷 강의를 병행하며 가을에 있을 자격증 시험을 대비하려 한다. 문득 만 23세가 지나면 외국어를 구사하는 혀가 굳는다는 말이 떠올랐고 어느새 그 마지노선에 와 있다. (그러나 책에도 나와 있듯이 외국어 학습에는 정해진 이상적인 나이가 없다.) 할 거면 확실하게, 그러지 못 할 거면 시도조차 아깝다고 여기는 나의 극단적 기질이 이번이 마지막 시도라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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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오베는 59세다.

  그는 사브를 몬다.

p.7

  이토록 단도직입적이고 실용적인(마치 오베처럼) 소설의 첫 문장. 오베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의 사람이 있으면, 마치 그 사람은 강도고 자기 집게손가락은 경찰용 권총이라도 되는 양 겨루는 남자’다. 그는 철저히 원칙을 따르는 사람이며, 자기 할 일은 자기가 하는 남자다. 그래서 그는 제 손으로 겨울용 타이어 하나 제대로 갈지 못하는 작자들로 넘쳐나는 세상에 대해 분노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철저하게(!) 까칠한 오베가 초반엔 좀 밉살스럽기도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엔 분명 공감 가는 구석이 있다.

 (...) 한때 여기에는 숲이 있었지만 이제는 집들뿐이다. 물론 다 융자를 낀 집들. 그게 오늘날 일을 하는 방식이었다. 신용카드로 쇼핑을 하고 전기차를 몰고 다니며 전구 하나 바꾸려고 수리공을 고용했다. 딸각딸각 맞추는 조립식 마루를 깔고 전기 벽난로를 설치한 뒤 그럭저럭 살아간다. 급박한 상황에도 벽에 못 하나 박지 못하는 사회. 이게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p.45


  오베는 잡담에 끼어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런 경향이 최소한 오늘날에는 심각한 성격적 결함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영감탱이 아무나와 무슨 주제로든 수다를 떨 수 있어야 했다. 순전히 그게 ‘사근사근한’ 태도라는 이유만으로.

p.56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고집스러운 노인네로 여기겠지만, 오히려 그런 고집스러움이 그의 삶에 어떤 진정성을 부여한다. 한결같은 삶의 방식이 주는 감동. 그는 누군가를 고자질하지 않으며, 말수는 점점 줄였지만 실천은 늘렸고, 자신이 꿈꾸던 집을 손수 지었었던 그런 남자다. 모든 것이 이렇게 쉽고도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오베의 인생은 묵직하게 우리의 마음을 누른다.


  사실 오베라는 남자가 처음부터 혼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의 옆에는 소냐라는 여자가 있었다.

  젊은 날의 오베는 기차역에서 우연히 본 소냐에게 첫눈에 반한다. 벌써부터 지나치게 과묵하고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이 남자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조차 요령을 피울 줄 몰랐다. 그저 묵묵히 소냐의 말을 들어주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릴 뿐이었다. 마치 그게 자신의 소명인 것처럼. 소냐의 이야기를 들을 때 오베는 ‘난생 처음으로 자기가 이 세상에서 유일한 남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오베와 소냐는 양 극단에 있는 사람들이다. 오베는 답이 명확히 떨어지는 수학을 좋아하고, 틈만나면 무언가를 수리하며, 세상을 불신한다. 소냐는 항상 책에 둘러싸여 있고, 목적 없는 여행을 사랑하며,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이토록 다른 이 둘을 자석처럼 붙여준 한 가지는 바로 소냐가 오베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그의 잠재력을 발견하고야만 여자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흑백의 삶을 살던 오베에게 색깔을 부여한 여자, 그의 ‘운명’ 자체가 된 여자였다.


 


(...)그는 정의와, 페어플레이와, 근면한 노동과, 옳은 것이 옳은 것이 되어야 하는 세계를 확고하게 믿는 남자였다. 훈장이나 학위나 칭찬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래야 마땅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종류의 남자들은 이제 더 이상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소냐는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 남자를 꼭 붙잡았다. 아마 그는 그녀에게 시도 써주지 않을 테고 사랑의 세레나데로 부르지 않을 것이며 비싼 선물을 들고 집에 찾아오지도 않을 테다. 하지만 다른 어떤 소년도 그녀가 말하는 동안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좋다는 이유로 매일 몇 시간 동안 다른 방향으로 가지는 않았다.

p.206

  자신을 유일하게 (그리고 자기 자신보다 더) 이해했던 소냐가 죽고 나서, 오베의 삶이 무너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베는 가장 자신다운 방법으로 소냐 곁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러나 새로 이사 온 이웃 부부(오베가 가장 싫어하는, 트레일러 한 대조차 제대로 후진시키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들)와의 인연을 시작으로 그의 자살 계획은 자꾸만 미뤄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철벽남' 오베는 어느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이젠 훨씬 많은 사람들이 오베의 삶을 구성한다.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가지각색의 이웃들을 바라보며 오베는 생각한다. 소냐라면 분명히 이런 상황을 좋아했을 것이라고. 행복해 했을 거라고. 어쩌면 이런 것이 그녀가 바라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베의 유일한 색깔이었던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그의 삶이 흑백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

​  정말 소중한 사람은, 곁에 있거나 없거나 나의 삶과 함께한다. 죽음이 곧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듯이. 오베라고 불리우는 남자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냐라고 불리우던 여자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녀를 만난 이후부터 그의 삶은 평생 그녀와 함께했기 때문에.


 

* 표지에도 등장하는, 영화로 치면 씬 스틸러급인 고양이. 고양이 키우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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