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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로메르 - 은밀한 개인주의자 ㅣ 현대 예술의 거장
앙투안 드 베크.노엘 에르프 지음, 임세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5월
평점 :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공부에 매달렸던 에릭 로메르는 성인이 되고 나서야 영화를 발견했고, 그 후로 영화는 쭉 그의 ‘마지막 예술’이 되었다. 나 역시 영화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한 건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다. 영화와 관련된 교양 수업을 무조건 듣고, 매년 열리는 고향의 영화제도 그때 즈음 처음 가 보았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단편영화를 찍거나 비평 수업을 듣고, 영화제에서 일해 보았다. 비록 영화에 대한 나의 관심은 정식으로 ‘영화를 하는 누구’가 되기에는 산발적인 것이지만, 백 년 남짓한 영화의 역사를 생각할 때면 그것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따라잡을 가능성이 (그나마) 높은 분야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로메르를 비롯한 젊은 시네필들이 “영화를 폭식적으로 소비함으로써 영화 문화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은 ‘마지막 세대’”라는 언급에서 조금 부러움을 느낌...)
내가 본 그의 영화는 <녹색 광선>과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인데 둘 다 시골에 대한 영화다. <녹색 광선>에서 델핀은 긴 휴가를 보낼 곳을 찾아 지방 여기저기로 떠나고, <레네트와 미라벨>의 두 소녀는 시골에서 우연히 만나 도시에서 함께 산다(공간에 대한 논의는 로메르의 영화의 핵심 요소다. 그에게 영화는 “자신에게 고유한 수단을 이용해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조직화에 따라 프레임과 평면 공간 내에 사물과 몸의 움직임으로 의미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순수한 시각 예술과는 달랐다). 그러나 로메르는 결코 작가주의 감독은 아니었다. 그는 우연을 옹호하는 감독으로서, “영화가 영화가 원래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기록하는 매체임을 증거라도 하듯이 빛과 하늘, 물, 바람을 화면에 담”고 그의 “영화에 대한 사랑은 자연에 대한 사랑에서 기원한다.” <녹색 광선>의 마지막 장면에서 태양과 바다가 잠깐 녹색빛으로 만나던 순간, <레네트와 미라벨>에서 그녀들이 ‘무서울 정도로 완벽한 자연의 고요함’(블루아워)를 포착하기 위해 일어났던 새벽을 떠올린다. 내가 로메르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은 인과가 촘촘한 스토리나 대단한 캐릭터성이 아니라 이런 우연의 순간,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고대하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영화는 세상 속에 있는 예술이어서, 그의 영화를 봄으로써 나는 내가 지나쳤던 세계로 다시 돌아가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세계에 아름다움이 있기에 영화 속의 아름다움이 있다. 만약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세계의 이미지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 만약 삶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삶의 모방을 또한 찬송할 수 있을까. 그것이 영화감독의 위치이다. 만약 내가 무언가를 촬영한다면, 그것은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내가 발견했기 때문이고, 그러므로 아름다운 사물은 이미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다.”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했던 사람, 때론 그 비밀이 모순을 일으키고 삶의 열정 자체가 된 사람, 카메라 뒤에 자신을 숨긴 사람, “다른 예술을 할 때 분명히 찾을 수 없었던 행복을 영화를 할 때 발견”했던 사람. 결국 영화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한 사람. 그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기록을 모은 이 책을 통해 로메르를 더 깊이 이해해 간다.
+) 맨 앞에 있는 추천의 글이 정말 좋았다. 그 뒤로도 책을 쭉 읽고 싶게 하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