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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김이듬 지음 / 열림원 / 2020년 12월
평점 :
책방 이듬 –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김이듬 지음
눈이 그치자 북극한파가 내려왔다. 두터운 외투를 입고 마스크를 쓴 채 출근길, 집을 나섰다. 꽁꽁 얼어붙은 어두운 길에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마을버스 정류장에 방한복을 입고 모자를 덮어쓴 남자가 혼자 떨고 있었다. ‘영하 17도’라는 무서운 숫자가 마을버스 안내판에 찍혔다. 남자 뒤를 따라 오른 마을버스는 얼음처럼 싸늘했다. 겨울의 밑바닥을 달리는 차창으로 어둠이 흐른다.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손수건으로 땀을 자주 닦던 사람이었다. 나더러 외양이 주는 느낌보다 여리고 순한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평생을 생각했는데 그는 오늘만 말했다. 그는 꽃길만 걸으려고 했다. 꽃길이 끝나고 눈보라가 치자 그는 떠났다.”
김이듬 시인이 쓴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이라는 책, ‘꽃길만 걸으려면 왜 따라왔니’에 있는 글이다.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이라는 책을 읽고 김이듬 시인을 알았다. 이토록 나는 시인을 모른다. 시인은 삶과 세상의 어둠에 응시하며 울며 노래한다. 김이듬 시인은 5년 전부터 일산에서 ‘책방이듬’을 열고 있다. 책방을 운영하며 벌어놓은 돈을 다 날리고 건강을 해쳤다.
“하여튼 돈을 모으기는커녕 그간 국내외 대학으로 강의를 다니며 알뜰히 모았던 돈을 다 날렸다. 10여 년 모은 돈이 반년 만에 다 사라졌다. 월세와 관리비를 내고 책을 주문하고 행사를 진행하며 지금까지 인건비를 단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건강이 나빠졌고 스트레스성 탈모가 겹쳐 몰골이 말이 아니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나서도 되도록 거울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질척거리는 계단을 내려가 지하철 승강장에 섰다. 매서운 추위는 지하까지 끈질기게 쫒아왔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소리와 바람을 몰고 달려온 지하철에 올랐다. 지하철안도 으스스 추웠고, 사람들이 별로 없어 썰렁했다. 마스크에 갇힌 사람들은 졸거나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었다. 지하철 안에서 책이 오래 전에 사라졌다. 책은 팔리지 않는 동네책방에 쌓여있다. 가방에서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이라는 책을 꺼내 펼쳤다.
“인문학과 예술을 나누는 소규모 공간은 소중하지만 사람 속으로 스며들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책방이듬이 시인보호구역처럼 7, 8년 버틸 재간도 담력도 없다는 걸 안다. 그렇다고 혼신을 다하지 않고 힘을 좀 비축할 것인가. 헤어질 것을 알고도 사랑을 멈출 수 없는 미친 연인들처럼, 언젠가 죽을 것을 아니까 소용없는 일에도 하루하루 죽을 듯이 치열할 수 있는 건 아닌지. 내가 극단적인 걸까? 초가을 바람 불어 덜컹거리는 퍼런 철공소 문 담벼락에 머리를 찧으며 울던 밤이 지나갔다. 너무 세게 머리를 박은 걸까? 그 여파로 자신감과 의욕 저하, 수면 자애를 겪고 있다.”
H지하철에서 내려 올라온 버스 정류장에도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추위에 벌벌 떠는 도시가 점점 어둠을 털어냈다. 멀리서 들려오는 앰뷸런스 소리가 도시를 찢어 발린다. 버스와 승용차가 이리저리 엉거주춤 앰뷸런스가 지나가도록 길을 터주었다. 앰뷸런스가 멀어지자 숨을 죽인 도시가 긴 한숨을 토해냈다. 우울하게 오른 버스 안에 희고 검은 마스크가 넘쳐났다. 코로나19가 유령이 되어 이 도시와 삶에 떠돈 지 벌써 1년이 가까워진다. 이 겨울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작년보다 더 맹위를 떨치고 있다.
“아직 나는 살아있다. 3년 이상 책방을 유지했다. 망하거나 까무러치거나 도망치지 않은 건 많은 방문객과 초대 작가들 덕분이었다. 특히 책방을 자신의 공간만큼 좋아하는 벗들이 있어 코로나19에 잠식당하지 않고 다 털리면서도 버틸 수 있었다. 이제 곧 더 멀리, 더 낮은 곳으로 간다. 보증금과 월세가 낮은 변두리의 모서리로 가지만, 바닥을 쳤지만 지하실은 아니다. 이동하는 건 설레는 일이고 도전하는 건 작가의 책무라고 어제 일기에 적었다.”
뱀 같이 굽은 터널로 들어간 버스가 어둠에 잠진다. 코로나19로 작년부터 일상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식당에서 밥을 먹는 일이 줄어들었고, 재택 업무와 비대면 회의가 늘어났다. 삶에 만남이 멀어졌다. 도시의 삶은 유리 파편처럼 깨어지고, 집에 갇힌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얼마 전에 갔던 지하 책방에도 사람이 없었다. 삶이 깃든 오래된 책방이 문을 닫았다. 나에게도 책을 멀리하던 절망적인 시간이 흘러갔다. 터널을 벗어나는 차창으로 빛이 흐른다.
“책방을 열고 가장 자주 왔던 이가 마음을 접고 떠났다. 우리의 마주침이 줄 무거운 비극성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거나 부드럽지 않은 살결을 만졌다. 그에게는 이제 다른 흥밋거리가 생겼다. 오늘 밤 내 울음소리는 참혹하지 않고 보통의 고양이 소리와 닮았다.”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까지 매서운 거리를 걷는다. 메마른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추위에 떤다. 출근시간 빵집 앞에서 서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은 것이 오래되었다. 가난하게 늙은 노인들이 무료로 빵을 하나씩 받아 들고 도시의 변두리로 사라졌다. 돌아가신 어머니 같은 할머니 한 분이 웃으며 나에게 빵을 받으라고 했었다. 그 분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올 것들은 돈 주지 않아도 온다. 밤이 그렇고 겨울이 그렇고 죽음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땐 아득했고 지금은 막막한 이들 앞에, 예열하지 못한 작은 방 안 추위처럼 가만히 사랑이 당도하기를.”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 모퉁이를 돌자 잿빛의 사무실이 보였다. 봄을 웃었던 길가 목련은 떨고 있고, 여름을 꽃피웠던 화단 속 백일홍은 짚으로 묶여있다. 겨울의 밑바닥을 지나면 봄이 다가오리라.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봄에 사랑이 올까. 죽음으로 멀어진 사랑이 나에게 다시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