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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의 눈 + 어린 왕자 (문고판) 세트 - 전2권
저우바오쑹 지음, 최지희.김경주 옮김 / 블랙피쉬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어린왕자'를 처음 읽었던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였다. 그 시기를 아주 또렷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그 당시에 책을 좋아하던 내 모습을 자랑하던 엄마 때문이다. 초등학교 2학년 밖에 되지 않은 딸이 '어린왕자'를 읽고 이해한다고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던 엄마의 말소리에서 행복이 느껴졌다. 나는 엄마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고 어떤 의무감으로 책을 읽었다. 당연히 꾸역꾸역 읽었던 '어린왕자'에서 어떠한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기껏해봐야 어린왕자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안쓰러운 감정을 느끼는 정도.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하긴 했으나 사실 '어린왕자'를 이해할 정도의 독서역량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 만화책을 좋아하는 편이었지 글자만 가득한 책을 선호하진 않았다. 오히려 책의 매력을 알게된 것은 성인이 되고 나서였다. 이제는 엄마의 자랑에 의무감을 느끼며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즐거워서 책을 읽는다. 이제는 만화책보다 글자만 가득한 책을 읽으며 즐거움을 느낀다.
이번에 읽은 책은 '어린왕자의 눈'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어린왕자'를 또 다시 읽어봤는데 분명 읽어보았던 책이고 아는 내용인데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어린왕자의 눈'을 쓴 작가는 '어린왕자'를 통해 사람들이 인생의 진리와 방향에 대하여 알기를 바라는 듯 했다. 그래서인지 이전에 가볍게 읽었던 내용이 생각보다 무거운 진리를 담고 있다고 느껴졌고, 단순한줄 알았던 어린왕자에게서 무엇보다 진한 동심을 느낄 수 있었다. 20살이 지나서야 제대로 된 어린왕자를 만난 기분이 들어 좋았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인 줄로만 알았던 '어린왕자'는 사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였다.
1. 길들여지지 않는 삶은 의미없다.
아마 책 전반에 걸쳐 가장 중요하게 나오는 개념이 '길들여짐'일 것이다. '길들이다'는 단어만 보았을 때 썩 좋아보이지 못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길들여짐'의 어감이 '복종'이나 '주종 관계'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의 '길들여짐'은 그런 의미와는 관계가 멀다. 작가가 말하는 '길들이다'는 '관계를 맺음'을 의미한다. 즉,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던 어떤 것으로부터 관심을 가지고 그것과의 관계를 맺은 후 그 관계를 발전 시킨다는 의미로 쓰인다. '어린왕자'에서의 여우를 기억하는가?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자신을 길들여달라고 부탁한다. 여우는 어린왕자와 관계를 맺음으로서 자신이 행복해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부탁을 청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우의 행동으로 보아 나오는 결론을 추측하면 사람은 길들여짐(관계)를 통해 행복을 얻는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인간은 관계를 통해 행복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볼 때, 길들여짐을 통해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이것 또한 '어린왕자'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여우는 어린왕자의 헤어짐을 앞두고 말했다. 어린왕자의 길들임을 통해 아무렇지도 않던 밀밭을 보며 어린왕자의 금발을 떠올릴 수 있다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밀밭이 어린왕자의 길들임을 통해 여우에게 특별해진 것이다. 이 관점을 내 삶에 적용해보자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어 그 사람과의 관계를 맺으면 나는 그것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 사람과 함께한 기억에 행복할 수 있고, 그 사람을 떠오르게 하는 것들로부터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우리에게 '길들여짐'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2. 개인의 행복은 사회제도와 연결되어 있다.
작가가 주장하는 '길들여짐'에 대하여 생각하다보니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하는 생각으로 연결되고 끝으로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하는 문제에 닿았다. 특히 요즘과 같이 '행복한 삶'에 대한 욕구가 표현되는 시기에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저마다 주어진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것으로 주어진 인생을 채운다. 그 과정에서는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어찌되었던 간에 주어진 시간을 보내면서 기왕이면 행복한 일을 채우는 것을 소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다. 내 인생은 내가 채우는 것이기에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다. 어차피 내가 행복하다고 말하고 정의 내리면 되는 것이라는 좁은 생각 안에서 스스로의 행복은 알아서 챙겨가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사회와 개인을 분리하게 되었고, 개인의 행복과 사회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최근에 읽었던 책(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과 이번에 읽은 '어린왕자의 눈'을 통해 개인의 행복과 사회제도가 깊은 관여가 있다는 글을 읽었고, 그 글에 타당성이 있음을 느낀 후로 내가 얼마나 좁은 시야로 살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홀로 개인의 행복을 주장하는 것은 회피에 가까운 행동이었던 것 같다. 물론 개인의 행복을 달성하는 것이 사회 전체를 행복으로 끌어올린 후에야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이 생각은 여전하다.) 하지만 개인의 행복과 사회가 아예 분리된 것이고 전혀 연관이 없다는 말은 더이상 할 수가 없었다. 개인이 행복하기 위해 사회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자세다. 정치나 사회에 관심이 없다는 핑계로 선거일을 하루 휴가로 여기고서는 투표 따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큰 일이 벌어지겠냐 생각했던 지난 안일한 날들이 사실은 도피였다. 지금 사회를 이만큼 끌어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느꼈다. 개인의 행복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회가 행복해야지만 우리는 사회의 제도로부터 억압이나 피해를 받아 불행할 일에서 멀어진다.
3. 아름다운 마지막을 위하여
작가는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음을 통해 공(空)으로 간다고 했다. 공(空)으로 간다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것인데 그런 시점으로 삶을 바라보면 굉장한 회의가 밀려올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공(空)으로 보내고 무엇을 남겨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내 삶 또한 언젠간 끝이 있기 마련이며 세상에 존재하던 내 육신은 죽음이 지나간 후에 썩어서 자연으로 돌아가며 무(無)가 된다. 결국 세상에 존재했던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내 육신이 사라진다하여 내 모든 것이 없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는 동안 삶을 채워나갈 무언가를 계속 만드는 것을 시도한다면 어쩌면 전부가 공(空)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지금 열심히 책을 읽고 책에 대한 생각을 쓰는 이 행위가 혹시 누군가의 삶에 관여하여 의미를 주게 된다면 그 '길들여짐'은 세상에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모든 것이 공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분명 어떤 것을 남길 수 있기 마련이다. 가끔 시간을 죽인다는 표현을 쓴다. 시간은 내가 죽이지 않아도 흐르는데 굳이 시간을 죽인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그 시간이 귀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치 무한한 듯 여기지만 시간은 끌어다 쓸 수도 없고 나중을 위해 남겨둘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을 위해 살며 아름다운 마지막을 위해 무언가 남기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린왕자를 읽다보면 많은 어른들이 나온다. 폭군, 주정뱅이, 허영심에 가득찬 사람, 바쁜 사람...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외톨이다. 누구와의 길들임도 겪지 않고 홀로 인생을 산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남기는 것이 없다. 아마 삶의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그 무엇도 남기지 못했음을 실감하고 괴로울 수도 있다. 생텍쥐페리가 굳이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어른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은 그런 어른이 너무 많고 그들이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당장 눈 앞의 것을 보느라 아름다운 마지막을 준비할 수 없는 어리석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 세상에 단 한명이라도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이가 생긴다면 (진심으로 길들여지는 관계를 맺는 사람이 생긴다면) 삶은 생각보다 넓고 커질 것이다.
4. 18년 만에 다시 만난 어린왕자
아직 나는 매우 어리다. 세상의 진리를 깨우치기에 경험이 적고 그 경험으로 만들어진 내 그릇은 작다. 그래서 책을 통해 간접 경험 하는 것을 중요하다. 간접 경험은 내 시야를 넓혀주고 나를 진리에 가깝게 해주리라 생각한다. 어린왕자를 다시 만났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보다 18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책 속의 어린왕자는 그대로였다. 여전히 순수하고 동심을 품고 있으며 맑고 고운 품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나는 변했다. 그 당시에는 어린왕자에게 안타까움 밖에 느끼지 못했으나 지금은 더 많은 것을 보았다. 아마 또 10여년이 흐른 뒤 다시 어린왕자를 만난다면 또 새로운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끝으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진정한 행복을 위해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 작가의 흔적이 보였던 것이다. 앞으로도 '어린왕자'는 이어질 것이고 '어린왕자의 눈'을 쓴 작가와 같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세상은 더욱 행복해질 것이다. 그 행복을 위해 나도 노력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