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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71)

집에서 밤참 라면을 먹으면 글을 친다(이미지들은 이전에 미리 올려놨지만). 여하튼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번에 다룰 새로 나온 책들의 컨셉은 '세계 여행'이다. 이 여행은 공간적이면서 동시에 시간적이기도 한데, 가장 먼저 둘러볼 곳은 가장 가까운 나라 일본이고, 1969년이다. 이때의 일본은 전후 최대 문제 작가 중 한 사람인 미시마 유키오(1925-1970)의 나라이다.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1969-2000>(새물결, 2006)가 증언해주고 있는.

 

 

 

 

1969년이면 작년에 개봉됐던 이상일 감독의 영화 <69 식스티나인>의 시간적 배경과 동일한 해이다. 그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1960년대 말 일본의 자민당뿐만 아니라 공산당까지도 기득권 세력으로 비판하면서 ‘미·일 제국주의 타도’와 ‘제국대학 도쿄대 해체’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투쟁한 극좌파 학생운동조직인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가 마침내는 동경대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던 해이다(해서, 프랑스 파리의 1968년에 대응하는 것이 일본 동경의 1969년이다).

그런 전공투가 극우파 지식인 작가의 거두 미시마 유키오와 1969년 5월 13일에 동경대학 교양학부 900번 교실에서 만나 2시간 30분 동안 격론을 벌였고, 그 녹취된 내용을 1999년 토론 30주년 맞아 장년이 된 전공투 참여자들이 벌인 후일담 토론 내용과 같이 묶어서 책으로 펴낸 것이 이번에 국역본이 나온 책이라 한다. 극우와 극좌의 만남이었지만 토론의 분위기는 '의외로'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책의 대략적인 내용은 지난주 대부분의 언론 리뷰들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늘어놓을 필요가 없겠다. 다만, 리뷰들 가운데 가장 유익했던 문화일보의 리뷰를 부분적으로 옮겨오면 이렇다.

-단순한 우파와 좌파가 아닌,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극 우파 미시마와 극좌파 도쿄대 전공투 학생들은 당시 왜 만나 얼 굴을 마주대하고 토론을 벌였을까. 역사의 전설로 남은 69년 대 화와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99년 이제 초로(初老)의 나이가 돼 다시 자리를 함께 한 전공투 출신 인사들이 당시 토론을 반추 하고 평가한 내용을 담은 책은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추진된 일본 근대화는 물론, 우리에게 있어서 근대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해 준다.

-2시간30분 가량 진행된 미시마와 전공투의 격론을 보면, “정말 근대를 둘러싼 중후하고 약동감 넘치는 활기찬 토의였다”는 30 년 뒤 전공투쪽의 평가를 이해할 수 있다. 토론장 입구에 자신을 고릴라 모습으로 캐리커처한 그림을 보고 웃었다는 미시마나 “약간의 비아냥과 예의의 표시로 교복을 입고 마중나갔는데, 폴로 티셔츠를 입은 러프한 모습으로 미시마가 나타났을 때 ‘아차 한방 먹었구나’ 생각했다”는 69년 집회를 기획한 기무라 오사 무(木村修)의 회고 등은 당시 현장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그렇다면, 미시마와 도쿄대 전공투의 만남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양쪽은 자민당과 공산당이라는 ‘사이비’ 보수와 진보가 대변해온 ‘전후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현대사를 철저하게 전복시키려한 근본주의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공통 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실 양자에게 당시 좌파와 우파는 뿌리 부터 잘못된 근대의 쌍둥이 질병에 다름 아니었다. 미시마가 전공투 와의 토론을 끝내며 “제군들의 열정만은 믿는다”고 말했던 이 유이기도하다. 폭력과 시간의 연속성, 전공투, 정치와 문학의 관계, 천황 문제에 대해 토론하며 미시마는 천황이란 이름으로 상징되는 일본 민중의 저변에 있는 것, 일본민족이 오랜 시간 지속시켜 온 멘탤러티에서 해결책을 찾은 반면, 전공투는 혁명을 통한 새로운 공간의 창출로 근대를 초극하려 한 점이 달랐지만 말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이후 종래 리버럴로 분류됐던 지식인들이 이념적 성향에 따라 좌파와 우파로 분화되거나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좌우의 입장을 극한으로 밀고가 일본을 근본에 서 사유하려 했던 미시마와 전공투의 토론과 30년 뒤 평가를 담은 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뉴라이트다 뉴레프트다’ 소리는 요란하지만 ‘사이비’ 좌파와 우파만 있을 뿐 진정한 의미의 좌파와 우파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작년봄에 '커밍아웃의 윤리'를 쓰면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소리만 요란한 좌파나 소위 '할복'하지 않는 우파를 신뢰하지 않는다.) 

사실 작년은 미시마의 탄생 80주기가 되는 해였고, 나는 그걸 대비하여 재작년에 러시아어로 된 두툼한 미시마 선집(사진)을 구해 왔었다(러시아에는 미시마 유키오의 거의 모든 작품이 여러 판본으로 번역/소개돼 있다). 하지만, 그걸 읽을 만한 여유가 여태 없었는데(앞으로도 없을까봐 걱정된다), 이 <미시마 유키오 대 전공투>는 그에 대한 관심을 새삼 불러일으켜주는바, 미시마 '입문서'로서도 제격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러시아본의 표지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그는 상당한 근육질의 몸매를 갖고 있으며 그것은 혹독한 훈련의 결과였다. 알폰소 링기스의 <낯선 육체>(새움, 2006)의 서문에서 미시마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대목: "일본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고대 일본의 무예들과 현대의 생리학적 기술들이 그에게 허락한 극한의 훈련과 고통에 그의 육체를 복종시킨 바 있다. 그는 그런 훈련과정에서 그의 육체가 가장 강렬하게 관능화되는 것을 체험한다. 그는 고대 일본의 서사시적이고 영웅적인 윤리를 부활시키고 그것을 그의 육체와 언어를 이용하여 미래 속으로 던져넣기 위해 현대 생리학과 심리학적 기술들을 철저히 연구했다."

 

 

 

 

"그의 실험적인 육체 편력을 육체의 능력을을 키우기 위한 무제한적인 투자가 주도하는 '육체의 전투'를 우리에게 폭로하고, 근육들이 고양하는 상상력에서 해방된, 그리고 근육들을 규약하는 타자들과 결합한 권력이 부양하는 상상력에서 해방된 '권력의 긴장'을 우리에게 폭로한다. 그는 인간의 영광의 정점은 세속적인 수단들이나 목적들과는 거리가 먼, 시커먼 죽음의 빛 앞에서도 위력을 잃지 않는 찬란한 권력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15쪽)

인용문에서 '찬란한 권력의 상징'은 'a figure of radiant power'를 옮긴 것인데, '인간의 영광의 정점'을 받는 술어로서는 뭔가 어색하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는 이 대목에서 'power'는 '권력'의 아니라 (육체의)'힘'을 가리키며, 'a figure of radiant power'는 '광채나는 근육질 몸매'란 뜻이 아닐까 한다(그것이 미시마가 보기엔 인간의 '최고의 영광'이라는 것). 미시마가 자신을 근육질 '몸짱'으로 만든 이유가 달리 있을 수 있을까? 그런 미시마는 1970년 일본 자위대 본부를 점거한 채 자위대의 총 궐기와 일본의 재무장을 호소하면서 전통무사식으로 할복자살한다.  

 

 

 

 

두번째 책은 <오페라의 유령>으로 유명한 가스통 르루의 <러일전쟁, 제물포의 영웅들>(작가들, 2006). 때는 1904년, 장소는 우리의 제물포 앞바다. 그리고 두 주연은 러시아와 일본의 수병들이다. 저자는 1904년 '르 마탱' 지의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는데, "그 해 4월 1일 밤 그는 러시아 수병들로부터 한 전투 이야기를 취재했다. 그 전투는 바로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두 열강이 벌인 최초의 제국주의 전쟁, 즉 러일전쟁의 서막을 연 제물포해전이었다. 그는 이 이야기를 특유의 문학적 필치로 기사화하여 신문에 연재하고, 이를 묶어 책으로 출간하기에 이른다"는 게 책의 출간배경이다.

우리로서는 예기치 않은 역사적 사건에 관한 예기치 않은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개를 좀더 옮겨오자면, "100여년 전의 문헌을 발견하여 번역한 이 책은 제물포해전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몇 안 되는 사료 중 하나이자 유럽인의 (편향된) 시각에서 재현한 전쟁 기록이기도 하다. '제물포의 영웅들'을 만나게 된 과정, 그들과의 인터뷰, 제물포 해전 이후까지 이어지는 전쟁의 묘사와 지은이가 만난 러시아 수병들과의 이야기가 액자식으로 교차하는 구성을 띠고 있으며, 외교문서와 여러 관련 자료로 제물포해전의 실체를 보여준다. 또한 러시아가 패배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반일친러의 시각에서 러시아 병사들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지은이의 묘사,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임에도 한국인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구성, 전쟁의 잔인한 참상에 대한 문학적이고 생생한 묘사 등으로 한국인 독자들에게 많은 생각할 지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200쪽 남짓이니까 비교적 가벼운 분량인데, 사실 '제물포 해전은 이듬해 벌어지는 '러일전쟁'(쓰시마 해전)의 서막일 테니까 이 책 또한 그 서론쯤으로 읽힐 수 있겠다(사진은 당시 발틱함대의 주력 전함이었던 '짜레비치'호). 그럼, 본론은? 러시아쪽에서 나온 책 두 권이 눈에 띄는데, <러일전쟁사>(건대출판부, 2004)와 콘스탄틴 플레샤코프의 <짜르의 마지막 함대>(중심, 2003)가 그것이다. 후자는 출간당시 언론의 관심을 끈 책이지만 곧 잊혀진 듯하다.

저자는 1905년 5월 27일,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벌인 '쓰시마 해전'을 인류 역사상 세계 5대 해전 가운데 하나로 꼽으면서, 이 전쟁에 참전한 러시아 발틱함대의 길고도 험난한 항해와 순식간의 처참한 패배를 생동감있게 그려내고 있다고. 물론 이 전쟁에서 일본은 승리하여 세계적 강국으로 부상하고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반면에 러시아는 혁명의 불길에 휩쓸려 제국의 지위까지 위태로워지는 지경에 이른다(러시아제국은 크림전쟁(1853-56)에서의 패전 이후 이 또 하나의 이 치욕적인 패배를 겪으며 점차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쪽 시각에 대해서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명문각, 1992)을 참고할 수 있다고 한다. 

 

 

 

 

세번째 책은 대서양을 건너와서 미국의 1920년대 풍경을 다루고 있는 F. L. 알렌의 <원더풀 아메리카>(앨피, 2006)이다. 책 자체가 '고전'인데, "미국인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좋았던 옛날;에 대한 기록"으로서 "1931년 출간된 이래, 수정과 증보를 거치면서 당대의 모순과 역동성에 대한 세밀화를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듣는 고전적 저서"라고. 원제가 'Only Yesterday'인 국역본의 부제는 '미 역사상 가장 특별했던 시대에 대한 비공식 기록'이다.  

소개를 부분적으로 옮겨오자면, 책은 "1918년 11월 11일 1차대전의 종결부터, '쿨리지Coolidge(후버Hoover) 호황'을 극적으로 붕괴시킨 1929년 11월 13일 주식시장 대폭락까지 11년간의 역사를 아우르며 무한한 낭만과 가능성이 살아 숨쉬던 미국의 청년기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정숙한 여성과 신여성의 치마 길이 차이, 알 카포네(사진)가 들고 다닌 명함 문구 등 사소한 사건들로부터 당시 대중들의 사고방식의 변화를 읽어내고, 적색공포―스캔들에 대한 열광―매너와 도덕의 혁명―부자의 꿈―지식인의 반란―부동산 투기 열풍―대활황 주식시장―주식시장 대붕괴로 이어지는 한 시대의 거대한 그림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1920년대의 매력'을 생생하게 복원하고자 하는 것. 국역본에는 원서에 없는 사진들이 1,000점 포함되어 이해를 돕는다고 한다. <제국의 부활>이나 <미국이라는 이름의 후진국> 혹은 마이클 무어의 미국('더티 아메리카')과는 좀 다른 시대, 다른 모습의 미국을 들여다볼 수 있겠다. 무어가 되돌려달라고 하는 미국이 '원더풀 아메리카'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류하자면, 시대사이면서 문화사에 속하는 책인데, 같은 1920년대 초반 조선의 문화의 유행을 다루고 있는 권보드래의 <연애의 시대>(현실문화연구, 2003)를 비교해가며 읽어볼 수도 있겠다. 한편, 러시아의 1920년대는 혁명 이후 신경제정책(NEP) 시기에서 스탈린 시대로 이행해가는 과도기였다. '원더풀 아메리카' 못지 않게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문화사의 거리가 될 텐데, 유감스럽게도 아직 이에 관한 책들은 소개돼 있지 않다. 톰슨의 <20세기 러시아 현대사>(사회평론, 2004)에서 그 뼈대 정도를 간추릴 수 있을 따름이다.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의 현장증언과 함께. 마야코프스키와 에이젠슈테인이 관통한 시대이기도 했던 1920년대...

 

 

 

 

네번째 책은 지중해로 넘어간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5인의 공저인 <지중해의 역사>(한길사, 2006)이 그것인데, 포괄적인 통사 형식의 지중해사는 처음 소개되는 게 아닌가 싶다. 소개를 옮겨오면, "지중해를 둘러싼 장대한 문명의 변화상을 담아낸 역사서"로서, "프랑스, 이탈리아[구 로마제국], 그리스 등의 유럽 국가들과 이스라엘, 오스만투르크를 비롯한 이슬람 세력과 아랍 국가 등 수많은 민족들과 국가들이 고대부터 현대까지 거쳐온 역사가 방대한 분량으로 펼쳐진다. 충실한 구성으로 프랑스의 지중해 관련 수업과 강의에서 교재로 자주 선택되는 책이다." 즉, 지중해사 '교과서'라고 보면 되겠다.

지중해 문명과 관련한 국내서로는 국내 저자 13인이 힘을 모은 책, <지중해, 문명의 바다를 가다>(한길사, 2005)가 있다. 김진경 교수의 <지중해 문명산책>(지식산업사, 1994/2001)과 진원숙 교수의 <지중해 문화사 이야기>(노벨미디어, 2003)도 관련서이고,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사랑의 풍경>(한길사, 2003)도 부제가 '지중해를 물들인 아홉 가지 러브스토리'인 만큼 이 분야의 책으로 꼽아볼 수 있겠다.

 

 

 

 

그렇게 꼽자면, 사제지간인 그르니에-카뮈의 지중해도 빠뜨릴 수 없겠는데, 장 그르니에의 <지중해의 영감>(한길사, 2003; 청하, 1990)은 그 기본서가 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카뮈 전공자인 김화영 교수의 산문집 <행복의 충격>(책세상, 2001)도 <지중해, 내 푸른 영혼>(민음사)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듯하고, 그게 카뮈의 <결혼. 여름>과 함께 '지중해'에 대한 나의 이미지를 결정지은 듯하다. 거기에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의 영화 <지중해>(1991)릉 얹으면 지중해에 대한 나의 '추억'은 거의 완성된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언제나 한 여름의 그 바다!..

<지중해의 역사>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책으로 칼 쇼르스케의 <세기말 비엔나>(구운몽, 2006)도 놓치기 아까운 책이다. "19세기말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빈)에서 얻어진 지적·예술적·문화적 성취들을 탐구한 저작으로, 1981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원제는 'Fin-de Siecle Vienna: Politics and Culture'이다.

 

 

 

 

소개를 더 옮겨보면, "지은이는 '포스트니체 문화(post-nietzschean culture)', 즉 니체 이후의 지성사와 문화사를 설명할 수 있는 훌륭한 모델로 비엔나를 선택한다. 그리고 문학, 도시계획, 조형예술 등 각 분야에서 비엔나의 문화현상과 대표적인 인물들의 활동상을 역사가와 문화분석가의 입장에서 깊이 접근해 들어간다. 이러한 방식으로 쓰여진 총 7개의 장은 각각의 개별적인 연구로 읽어도 무방할 정도이다." 가령, "압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비엔나 공간에서 일어나는 주체들의 상호작용을 표현한 건축가들, 자유주의의 몰락 속에서 발생한 표현주의 문화 등을 분석"하면서, "또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정신분석학), 아르놀트 쇤베르크(음악), 쿠스타프 클림트(회화) 등 '아버지에 대한 저항'을 기본 코드로 빈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지성인들을 다뤘다."

비엔나 건축에 대해서는 임석재 교수의 <추상과 감흥>(문예마당, 1995)이 오래전에 나온 책이다. 프로이트에 관해서는 두말한 건덕지도 없고, 쇤베르크 관련서로는 '아도르노와 쇤베르크'를 주제로 한 노명우의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문학과지성사, 2002)가 읽을 거리이다. 이 참에 새로 나온 클림트 화집도 구해보실 수 있겠다. 이 모두가 동시대 비엔나의 소산이라고 하니까 쟁쟁하기 그지 없다. 다만 거기에 "19세기 말 합스부르크 빈의 문화와 역사 속에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사상과 삶을 조명한 책", 스티븐 툴민의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이제이북스, 2005)를 더 얹으면 금상첨화겠다.  

 

 

 

 

당신이 비엔나까지 둘러봤다면, 이제 모국행을 서두를 때이다. 고종석의 <모국어의 속살>(마음산책, 2006)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책은 "2005년 3월부터 1년간, '시인공화국의 풍경들'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글들을 묶"은 것으로 그 대부분을 읽은 터이지만, 책으로 묶어서 읽는 맛은 또 다르다. "우리 신문학 백년사에서 제 방 하나를 너끈히 가질 만한" 시인 50명의 시집을 한권씩 소개하는데, 이만한 연재가 우리 언론사에서 자주 있었던 것인가를 묻고 싶다. 내가 금요일은 뺀 평일에 한국일보를 주로 보는 것은 순전히 고종석 때문이라는 걸 굳이 고백해야 할까? 아마도 내년 이맘때쯤에는 고종석 버전의 <말들의 풍경>도 출간될 것인바, 그런 일만으로도 나이먹는 일의 허망함이 절반은 상쇄된다고 말하고 싶다(나머지 절반의 허망함은 각자가 누리도록 하자).

거기에 덧붙여, 김윤식 교수의 새 평론집 <작가론의 새 영역>(강, 2006)도 눈길을 끄는 책이다. 그밖에 책에 관한 책들, 곧 <읽는다는 것의 역사>(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6),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마티, 2006), 그리고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 2004)의 저자 최종규의 <헌 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 2006)은 도대체 책이 무엇인관데, 란 질문을 던지게 해주는 책들이겠다. 그런 질문들에 미처 답하지 못하더라도 <조선 최고의 명저들>(휴머니스트, 2006)는 놓치지 말아야겠다. "<조선왕조실록>, <열하일기>, <난중일기> 등 조선시대를 대표할만한 14개의 명저들을 소개"하면서, "기행문과 일기, 보고서, 문집 등 국보급 기록에서 당시 민중 사이에서 즐겨 읽힌 베스트셀러까지, 각 문헌의 주요 내용과 그에 얽힌 역사적 배경, 당대인들의 사상과 문화적 깊이를 살핀다"고 하니까 우리 것의 소중함을 다시금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듯하다.

06. 04. 05 - 06.

P.S. 부록으로 클림트의 (가장 잘 알려진) 그림 '키스'를 이 자리에 옮겨놓는다. 책읽기에 지친 영혼들께서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용맹정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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