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지도
앤드루 더그라프.대니얼 하먼 지음, 한유주 옮김 / 비채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이야기'와 '서사'를 다룬 매체가 많지만 텍스트로 이루어진 소설을 읽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상상력에 그 비밀이 있다고 생각한다. 텍스트를 읽으며 상상하고 생각하며 머릿속 풍경을 만들어가는 즐거움. 이 즐거움은 내가 느끼고 싶고 내가 생각하고 싶은대로 만들 수 있는 즐거움으로,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영상보다 텍스트가 더 매력적이다. 작가가 만든 세계를 내 머릿속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구현하는 즐거움, 소설 읽기를 즐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런데 텍스트가 아닌 그림으로 소설 속 세계를 구현한다면 어떨까? 서사를 다 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몇개로 만드는 소설 속 세계. 이 그림은 영상처럼, 누군가가 만든 이미지로 인해 나만의 상상력을 줄어들게 만드는 것일까?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적절한 그림은 오히려 소설 속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보물 찾기 지도'가 되어준는 듯 싶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특별함 경험을 안겨준 책이 바로, 《소설&지도》다.


"작가는 탐험가다.
한 걸음씩새로운 땅으로 전진해 들어간다."
랠프 월도 에머슨


《소설&지도》는 제목에서 드러나 있듯, 소설이 지도로 만들어진 책이다. 뉴욕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앤드루 더그라프는 소설로 만들어진 세계를 한 장 혹은 여러 장의 지도로 완성했다. 같은 툴로 구현한 것이 아니라 작품이 다르듯, 지도 역시 같은 형식으로 만든 장은 없다. 덕분에 한장 두장 넘길때 독작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크다. 때로는 비슷한 디자인의 그림이 보일 때도 있지만 그렇다면 바라보는 각도를 조금 바꾸어 보는 독자가 다른 감각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마치 소설 속 세계를 바라보는 각도의 차이가 그림에 담아내기 위해 저자가 노력한 것이 보인다고나 할까.

그리고 저자의 센스는 이미 소설 속 세계가 지도나 그림으로 압축 정리된 적 있는 《나니아 연대기》와 같은 작품은모두 빼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한 장의 이미지 세계로 표현된 적 없는 19편의 작품을 엄선하여 완성했다. 원래 목표는 50편의 작품이었다고 하는데. 책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로서 이왕이면 《소설&지도》에 담지 못한 작품 32편도 지도로 완성되면 좋겠다.

《소설&지도》의 19편의 작품 중 읽은 내가 직접 읽은 작품도 있었고, 내가 읽어보지 못한 작품도 있었다. 읽은 작품은 알고 있는 소설 속 세계를 어떻게 구현했을지 관찰하는 즐거움이 컸다. 《오디세이아》, 《햄릿》, 《로빈슨 크루소》, 《오만과 편견》, 《크리스마스 캐럴》, 《80일간의 세계일주》, 《허클베리 핀의 모험》, 《고도를 기다리며》 등은 이미 읽은 작품이었다. 덕분에 내가 상상하고 그려왔던 세계와 이야기를 저자가 어떻게 구현했는지 확인하며 살펴볼 수 있었다.

책은 소설을 소개하는 글이며 동시에 소설 속 세계를 어떻게 관찰했는지 설명하는 장이 나오고 그 뒤에 이어서 펼쳐지는 상상의 지도를 확인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작가가 어떻게 소설을 읽고 지도로 구현하려고 했는지 의도를 확인한 후, 바로 꺼내보는 지도는 소설 속 세계를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건 《오만과 편견》을 엘리자베스 어머니인 베넷 부인의 시각에서 만든 점이었다. 《오만과 편견》은 장소가 부각되기보다 인물 관계가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소설인데. 참 절묘한 방법으로 표현했다. 마치 호그와트의 움직이는 계단처럼 각 인물이 어느 인물에게 닿아있고 또 끊어져 있는지를 통해 《오만과 편견》을 표현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화려한 그림이 아니라 아쉬웠지만 소설의 내용을 잘 담은 지도라고 생각한다.

내는 형태로 완성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 뿐만 아니라 《80일간의 세계일주》처럼 당대 시대상이 잘 드러난 작품의 경우 저자는 그 시대의 모습을 이미지에 제대로 고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 그 차이를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디세이아》의 배와 《80일간의 세계일주》의 배 그리고 《모비딕》의 배가 전부 달랐다. 그 다름을 확인하는 것 역시 이 책을 읽는 묘미다. 소설 하나하나를 한 장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상상력을 발휘하고, 때로는 작가가 소설을 만들며 참고했을 자료를 삽화 속에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화려하고 세밀한 그림으로 소설 속 세계를 느끼는 즐거움이 컸다.

아는 소설은 알기 때문에 하나하나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었다면, 읽지 않은 소설은 읽지 않았기 때문에 소설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상상하는 즐거움이 컸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읽은 소설을 확인하는 순간보다, 읽지 않은 이야기가 어떨지 생각할 때 더 즐거웠다. 작가가 쓴 짧은 에세이는 소설의 줄거리이기보다 소설을 압축하기 위해 자신이 무엇에 집중했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그림 설명서에 가까웠기에 소설의 내용을 스포일러 당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작가의 글을 읽고 무슨 내용의 소설일지 호기심이 더 커져갔다. 그리고 확인한 한 장의 세계는 이렇게 다채로운 세계가 텍스트로는 어떻게 구현되어 있을지 궁금해졌다. 한마디로 영상이 아닌 텍스트로 상상하는 즐거움을 안겨주는 소설에 대한 지도는 소설의 세계를 한정시키는 프레임을 독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이건 뭐지?'라는 호기심을 일으키는 보물지도였다. 어린 시절 보물 찾기를 위해 자세하고 세밀한 지도 대신 약도와 표식으로 채워진 보물지도를 들고 실제 세계를 상상하고 예측하며 확인했던 것처럼 《소설&지도》는 고전 소설을 상상하고 예측하고 직접 확인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지도가 기본적으로 위치와 목적지를 확인하는 수단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지도는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버려진다. 《소설&지도》는 다르기 바란다. 이미 아는 (혹은 안다고 생각하는) 삶과 장소 너머로 계속 여행하려는 사람을 위한 지도이기 때문이다. 자기 위치를 확인하기보다는 길을 잃어버리는 게 우리 목표이다.

정보는 얼마 없지만 자신감만큼은 넘치는 도시인처럼, 여러분이 좀 더 길을 잘 잃을 수 있게 돕겠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이 말이 실제가 되는 책, 《소설&지도》였다.
읽어본 적 없는 10편의 소설 속 세계를 얼른 확인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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