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계몽의 변증법 - 철학적 단상 ㅣ 우리 시대의 고전 12
테오도르 아도르노 외 지음, 김유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8월
평점 :
2차세계대전의 포연이 사라지기 전의 비참하고 음울한 시대상황속에서 쓰여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의 색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어둡다.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책 중의 하나"라는 하버마스의 말처럼, 이 책은 무척이나 비관적이다. 이 비관은 단순히 저자들의 기질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들 사유의 철저성이, 근본을 파헤치는 도저한 비판이 이러한 비관을 그리고 어두움을 낳은 것일 뿐이다.
이 책을 말할 때, 먼저 그리고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책의 문체(스타일)이다. 근대와 계몽의 핵심적 코드인 (사태를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계산가능성, 합리성, 체계성에 대한 비판과 전복은 비단 내용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체에 의해서도 수행되기 때문이다.
<계몽의 변증법>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문장들은 쉽사리 이해의 그물에 포착되지 않는다. 이리저리 미끄러지는 문장들은 전체적인 구성과 체계를 파악하기도 어렵게 한다. 자기 이전의 사유에 대해 철저한 비판을 하고자 했던 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저자들도 일반적으로 쓰이는 개념에 자신들만의 독특한 의미를 집어 넣어 버린다.(가령, 전통형이상학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수행했던 하이데거가 그러했듯이.) 저자들은 자신들의 책이 쉽게 읽히고, 쉽게 이해되고(대부분 오독의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리하여 쉽게 내던져지고, 마침내는 쉽게 망각되어 버리는 그다지 소망스럽지 못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이러한 형식을 고안했다. 이러한 형식 자체가 이미 계몽과 근대에 대한 저항이다.
이제 이 책의 내용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계몽의 변증법>은 단적으로 말해서 역사철학서라고 할 수 있다. 현대에 철학을 하기 위해서 역사에 대한 이해와 감각은 필수적이다. 워낙에 쌓인 것이 많은 "이 늙은 시대"(니체)에 철학을 하는 이들은 반드시 전통과 그들의 선배와 싸우지 않을 수 없다. <계몽의 변증법>은 인류의 정신이 어떻게 출발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왔으며, 지금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가를, 저 애니미즘의 시대, 신화의 시대로부터 훑어보는 책이다.
자연앞에 맨몸으로 선 인간은 그 자연에 대해서 공포를 느낀다. 그는 언제 자연에 의해서 죽음의 심연으로 떨어질지 모른다. 그는 살아남기를 원한다.길은 오직 하나.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다. 변칙적인 자연의 움직임을 예측가능한 것으로, 안정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기 위해 인간은 자연을 개념화한다. 고대에 인간의 이러한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신화이다. 자연은 신이되고 신은 사실상 인간에 다름아니다. 이런 개념적 작업과 동시에 인간은 자연을 실질적으로 정복해 들어간다.
그러나 이렇게 외적자연에 대한 지배가 가능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 바로 "내적자연"에 대한 지배다.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철저하게 지배할 수 있을 때만, "외적자연에" 대한 지배에 성공할 수 있다. 외적자연에 대한 지배와 더불어 내적자연에 대한 지배가 이루어질때, 문명은 성립한다. "문명은 억압이다."(프로이트)
하지만 이 두 지배와 더불어 발생하는 또 하나의 계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 곧 "사회적 지배"이다. 문명의 유지는 그저 인간이 모여사는 것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자연지배의 영속을 위해서 인간들은 조직화된다. 인간의 활동은 어떤 체계속에서 조직되고 할당된다. 이 세 지배의 연관, 이것이 "지배의 삼중적 구조연관"이다.
인간의 역사가 이렇듯 지배로부터 시작된다면, 사실상 신화의 시대도 낭만이란 없다. 이미 신화속에도 근대를 낳은 계몽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파악하는 "근대의 계몽정신"은 어떠한 것인가? 계몽의 특징을 몇가지로 정리해 보자. 우선 계몽은 "계산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맞지 않는 것은" 배척한다. 이 하나의 기준에 의해서 모든 사물은 심지어 인간마저도 계산되고 교환의 대상이 된다. 계몽정신의 실제적 구현 형태는 "교환"이다. 교환은 등가의 것 사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가격은 숫자로 매겨진다. 숫자로 매겨질 수 없는 것, 계산불가능한 것은 따라서 배척된다. 숫자에 의해 동일화된 것들은 하나의 체계에 포섭된다. 계몽의 정신의 적나라한 발현을 우리는 "체계"와 "동일성의 원리"에서 본다.
결국 계몽이 도달한 곳은 어디인가? 지배하고 계산하는 "도구적 이성"이 만든 "관리되는 사회"가 아닌가? 저자들에게 나치즘과 파시즘이 보여준 광기와 야만은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계몽의 필연적 귀결일 뿐이다. 신화의 세계에서 벗어나 합리성을 추구하고자 했던 계몽은 결국 신화로 추락한다. 처음부터 계몽은 결국 신화였다. 계몽의 자기파괴성이 낳은 결과가 현대사회와 같은 철저하게 "관리되는 사회"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과거로, 역사가 시작되던 그 지점으로는 돌아 갈 수는 없다. 반복해서 산다고 해도 지금과 똑같이 파멸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저자들의 논리에 따르면 이런 비관적인 전망에 갇혀 빠져 나올 수가 없다. 실제로 이들의 비판을 반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행동이나 실천의 여지도 사실상 거의 남겨두지 않는다. 니체가 그랬던가. 너무 많이 그리고 제대로 알아버린 자는 행동하기가 어렵다고.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이론적 반박은 어렵지만, 실천적으로는 반박가능하고 가능해야만 한다. 저자들이 밝혔듯이, 인간은 어쨌든 자기보존을 해야만 하고, 그 자기보존이 좀더 나은 형태로-구체적으로 말해서 보다 많은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분위기속에서-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를 돌아볼 때, 낙관적인 전망을 갖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마냥 비관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다. 물론 아도르노는 이런 체계적으로 억압된 상황에 대한 출구로 예술적 사유를 제시하기는 한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억압의 해소가 가능할는지 몰라도 일상적, 정치적 삶의 문맥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