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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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에 조카들에게 홍세화 선생의 <생각의 좌표>를 선물했다. 충격적이었던 일은 7명의 조카들이 홍세화 선생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수줍은 성격의 조카 한 명만이 내게 몰래 다가와 "삼촌...혹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똘레랑스 그분 아닌가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을 뿐이다. 홍세화 선생을 모를 수도 있다. 뭔가를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세대 간의 단절이 놀라웠다는 것이다. 홍세화 선생은 작년에 작고하시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활동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10-20대의 청년들이 알지 못한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특히 조카들은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다들 소위 명문고, 명문대를 다니고 있는데도 홍세화 선생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점이 놀라움을 배가시켰다. 홍세화 선생의 메시지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웠던 것일까. 


홍세화 선생은 누구인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전사, 빠리의 택시운전사, 작가, 언론인, 진보신당 대표, 장발장은행장, 자유인, 아웃사이더..."(2024. 4. 20. 한겨레21, 안영춘 기자) 홍세화 선생은 어떤 사람인가. 고종석은 이렇게 평한다. "신념의 일관성에서, 자신의 존재조건에 대한 반성의 철저함과 항구성에서, 말과 행동의 일치에 대한 점검의 부단함에서 그를 앞설 사람을 나는 얼른 떠올리지 못한다."(<홍세화의 공부>에서 재인용) 고종석의 평가에 나는 100% 동의한다. 홍세화 선생은 부조리한 세상과 억압적 사회의 모순과 항시 긴장하면서, 부단히 자기 자신을 성찰하였으며,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해 부지런하였고,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내세우기보다 타인의 말을 잘 듣는 데 더 열심이었던 '소박한 자유인'이었다.


홍세화 선생의 최대 업적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에 똘레랑스를 전파했다는 것이다. '똘레랑스'란 무엇인가. 필리프 사시에의 똘레랑스에 관한 책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던 선생의 육성으로 들어보자. “간단하게 줄인다면 ‘관용’보다는 ‘용인’입니다. 아랫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인다’기보다 종교나 사상이 달라도 그 ‘차이’ 자체를 다른 그대로 ‘참고 받아들인다’는 정신 자세입니다.” (2010. 2. 1.자 경향신문 기사에서 인용) 그렇다면 똘레랑스 정신은 구체적인 맥락에서 어떻게 나타는 것인가. “‘차이를 용인하라’는 말은 억압하고 배제하는 인간들의 정신 자세와 행동에 대해 단호한 반대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소수자·국가보안법·지역·종교의 앵톨레랑스에 단호히 반대하는 것입니다. 앵톨레랑스에 맞서 싸우고 저항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톨레랑스는 소수자·약자의 권익을 위한 사상적 무기이자 민주주의 성숙의 무기입니다.”(같은 기사에서 인용) 문명국가의 최소조건이라 할 차별금지법이 아직도 제정되지 않고 있고, 차별금지법에 대한 반대가 거센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똘레랑스'가 지금 여기에서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홍세화 선생의 책 중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는 책이 <생각의 좌표>이다. 이 책의 부제는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을까. 선생은 제도 교육과 미디어에 의해 주입되었다고 본다. 제도 교육과 미디어는 한 사회의 지배적 이념을 주입하는 장치이고, 한 사회의 지배적 이념은 지배계급의 이념이라는 명제가 타당하다면, 결국 우리 모두는 지배계급이 주입한 이념에 따라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자주 자기 존재를 배반하는 행동이나 의식을 보이는 것이고, 특히 선거 국면에서 자기 존재를 배반하는 투표의 행태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선생은 그래서 '의식화'가 아니라 '탈의식화'를 주문한다. 머릿속이 이미 지배계급의 이념으로 의식화되어 있으니(즉 지배계급에 대한 자발적 복종 의식을 내면화하고 있으니) 그와 같은 의식에서 우선 벗어나보자는 것이다.


탈의식화를 위해 우선 당장 해야 할 일은 "왜?"라고 묻는 것이다. 상대가 싫어서, 우리 편이 좋아서가 아니고, 상대의 의견이 왜 문제인지, 우리 편의 주장이 왜 타당한지를 물어야 한다. 최근 사회적으로 '반지성주의'가 문제 되고 있는데, '반지성주의'의 발호는 결국 '"왜?"의 죽음'에서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왜?"라는 질문은 우선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던져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기부정이고, 이 자기부정을 통해 진보의식은 성숙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을 통해 우리는 "남과 비교하는 일이 아닌, 어제의 나보다 더 성숙된 오늘의 나, 오늘의 관계보다 더 성숙된 내일의 관계를 위한 비교"(137쪽)를 할 수 있게 된다. 주입식 교육에 의해 이미 지배 이념으로 의식화된 머리에서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행위가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구체적인 방법으로 폭넓은 독서, 열린 자세의 토론, 직접 견문, 성찰이라는 네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뻔해 보이지만, 실천이 어렵다. 실천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적실한 방법이다. 


이 책에서 선생은 자신이 붙들고 고민한 사회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가 안고 문제들이 어디 손쉬운 해결을 허락하던가. 대신 선생은 다음과 같은 질문과 과제를 던진다. "무지와 무관심은 그 자체로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몰상식의 자양분이며 영악한 자들이 뻔뻔하게 군림하는 토양이 된다. 서민 대중은 기득권 세력을 선망하고 가진 자들의 언어에 잘 현혹되고 그들을 지지한다. 뻔뻔한 자들의 기득권 체제는 지속되며 사회 안에서 불평등과 고통, 불행, 폭력은 줄어들지 않는다. 대중의 무지와 무관심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우리에게 이 맞섬은 한 사회가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때 끝내 마감할 수 없는 과제가 된다."(182-183쪽)

남과 비교하는 일이 아닌, 어제의 나보다 더 성숙된 오늘의 나, 오늘의 관계보다 더 성숙된 내일의 관계를 위한 비교에 머문다면 다수자, 소수자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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