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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마다 비우다 - 서울에서 고흥까지 520킬로미터의 사색
김학배 지음 / 알렙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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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걷고,
살아 있으니 걷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걷는 여정이 마치 소중히 간직했던 풀내음 같은 일기를 읽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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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떠도는 별
꽃잔 / 유페이퍼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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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과 함께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
ㅎ~~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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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스마트스토어로 투잡하기 - 월급이 부족한 직장인이여, 시작하라!
해밀(박하나) 지음 / 비제이퍼블릭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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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스마트스토어 관련 서적을 다 찾아보고, 곁에 두어야 하는 책으로 판단되어 구매..^^
왕쌩초보인 저같은 사람에게 등대가 되어주는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삶에 새로운 가능성과 힘을 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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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크 영웅전 전집 2 현대지성신서 22
플루타르크 지음, 이성규 옮김 / 현대지성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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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세계를 정복하고, 32세를 일기로

불꽃같은 삶을 마친 남자

"알렉산더"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1. 탄생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56년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립포스 2세는 7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알렉산더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는 다섯번째 부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부인들이 딸들만 출산하여 알렉산더는 맏아들로서 후계자 수업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알렉산더가 태어나기 전 상황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그리스의 권력이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다시 막강한 테베로 넘어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필립포스 2세는 테베에 인질로 잡혀와 있었던 그는 테베의 보병 전투방식을 분석하였습니다.

 

마케도니아를 반석 위에 세우고 강력한 국가를 꿈꾸던 필립포스 2세는 ‘크레니데스’라는 곳에서 금광을 발견하여 엄청난 재원을 마련하게 됩니다. 그는 이 행운의 도시를 자신의 이름을 따라 필립포스(신약성경에는 빌립보...사도 바울의 빌립보서..^^)라고 바꿉니다. 필립포스 2세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팔랑크스를 혁신하여 긴 창으로 무장한 보병 부대를 훈련하여 그리스를 통일하게 됩니다.

* (팔랑크스) 그리스의 중장보병 전투대형으로 오른손에는 ‘도리’라는 2.5미터 창, 왼손에는 ‘호플론’이라는 둥근 방패로 방어하는 전투대형. 필립포스는 이 팔랑크스를 개선하여 ‘사리사’라는 6.5미터의 긴 창에 방패없는 밀집전투대형으로 측면은 경보병과 기마병이 수비와 공격을 진행하는 전투 방식으로 그리스를 제패. 필립포스 2세의 개선된 팔랑크스는 그 촘촘함으로 적의 화살 공격도 어느 정도 방어하기도 한다. 팔랑크스는 울퉁불퉁한 지형에서 기동성이 뛰어난 로마의 ‘레기온’군단에 의해 패하게 된다.

   

2. 소년 시절

 

알렉선더는 다소 마른 체형에 열이 많은 체질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12살 때 명마 부케팔루스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테살리아인 필로니쿠스가 명마를 필립포스 2세에게 팔려고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말은 너무나 난폭하여 다루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알렉산더는, “말을 다룰 줄 모르기 때문에 훌륭한 명마를 알아보지 못하는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필립포스 2세는 알렉산더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너보다 훨씬 노련한 사람이다, 네가 저 사람들보다 말을 더 잘 알고 더 잘 다룰 수 있다는 말이냐?”

알렉산더 더 잘 다룰 수 있다고 했고, 못 다룬다면 엄청난 말값을 치루겠다고 했습니다.

부케팔루스가 햇빛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에 겁을 먹은 것을 알아 본 알렉산더는 말을 해를 향해 돌려 세우고 진정시킨 후 올라타고서는 쏜살같이 달렸습니다. 명마 부케팔루스는 알렉산더의 것이 되었고, 필립포스 2세는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필립포스 왕이 비잔티움에서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 마케도니아는 국새와 함께 16세의 알렉산더가 다스리고 있었다. 이 시기 알렉산더는 반란을 일으킨 마이디를 정벌하고, 새롭게 식민지를 세운 다음 그 곳을 ‘알렉산드로스폴리스’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알렉산더에 대해 사람들은 이미 ‘왕’이라고 칭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 필리포스 2세는 좋은 스승으로 당시의 지성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데리고 옵니다.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그리스 철학과 정치, 경제, 사상, 문화 등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3. 아버지와의 갈등

 

알렉산더는 열이 많은 체질인만큼 다혈질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아버지의 연애 사건과 결혼문제로 점차 멀어지게 됩니다.

필립포스 2세의 후궁인 클레오파트라와의 결혼식 자리에서 그녀의 큰아버지인 아탈루스가 필립포스와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에 격분한 알렉선더는 술잔을 그의 얼굴에 던졌습니다. 이 광경을 본 필립포스 2세는 홧김에 칼을 빼서 알렉산더를 찌르려고 하다가 그만 넘어졌습니다.

알렉산더는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보시오. 유럽에서 아시아로 건너가 정복할 준비를 하시는 분이 이쪽 자리에서 저쪽 자리로 건너가시지도 못하는 모습을 말이오.”

아버지를 조롱한 알렉산더는 일리리아로 피신했습니다. 이후 화해를 했지만,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갈등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필립포스 2세가 암살당하게 됩니다.

 

4. 왕에 오르고 위기를 극복하다.

 

필립포스 2세가 암살당한 후, 그에게 정복당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마케도니아 왕국에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또한 필리포스 2세의 부하들은 암살의 원흉을 알렉산드로스로 지목하고 그를 없애기 위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지탱하던 나라는 반란에 휩싸이고, 휘하 장군들과 신하들마저 자신을 노리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알렉산더는 침착하게 대처합니다.

남들이 보기엔 20살의 애송이 왕자에 불과했던 알렉산더는 그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난폭한 말, 부케팔루스를 길들여 자신의 애마로 삼은 것처럼 이 사황을 통제하기 위한 계획에 착수합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엄숙하게 마친 알렉산더는 아버지의 측근이었으며 내분의 원흉인 아탈루스를 숙청하고, 반란을 일으킨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하나둘 점령해나갑니다. 이웃 국가였던 테살리아를 굴복시키고, 반란을 주도했던 테베를 파괴하고, 본보기로 6천명을 처형하고 3만명을 노예로 팔아 버립니다. 이에 놀란 아테네 등 나머지 도시국가들은 사신을 보내 알렉산드로스를 왕으로 인정하고 사죄하며 그의 분노를 달랩니다. 그렇게 반란은 끝이 났고, 알렉산더는 과거 아버지가 정복했던 영토를 다시 되찾게 됩니다.

 

 

5. 정복군주

 

알렉산더는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페르시아 정복을 위해 그리스의 군사를 모아 조직한 헬라스 연맹의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334년에 마케도니아군과 헬라스 연맹군을 거느리고 아버지가 못다 이룬 페르시아 원정을 달성하기 위해 소아시아(지금의 터키)로 출정합니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3세와 이수스에서 드디어 붙게 됩니다. 황금빛 갑옷을 입은 용맹스러운 알렉산더 대왕은 불사조 군단(페르시아의 왕실 친위대)에 둘러싸인 다리우스 3세를 맹렬히 공격하여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결국 이 싸움은 알렉산더의 승리로 끝이 났고, 다리우스 3세는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 아내, 두 딸을 포로로 잡게 되는데, 그들에게 왕족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고 매우 정중하게 대했습니다. 나중에 왕비의 환관 티레우스로부터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리우스 3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페르시아 왕국과 왕위를 지켜 주시는 여러 신들이시여! 페르시아를 다시 일으켜, 이 나라를 이어받았을 때와 똑같은 상태로 다시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알렉산더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나 만약 운이 다하여 페르시아 왕국이 허물어질 수 밖에 없다면, 그리고 저의 멸망이 신들의 노여움이나 운명에 따른 것이라면, 부디 키루스 대왕의 왕좌에 알렉산더말고는 아무도 않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는 지금의 이라크 북부에 있는 가우가멜라에서 다리우스 3세와 또 한 번의 전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도 알렉산더는 승리하게 됩니다. 결국 이 전투에서 패한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집니다. 알렉산더는 전쟁이 끝난 후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에 입성하여 화려한 동방의 궁전을 보게 됩니다. 페르시아 제국이 사라진 다음에도 그의 정복과 탐험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거침없는 행보는 마라칸다(사마르칸트의 옛 이름)를 거쳐 인도의 인더스 강 근처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의 위대한 탐험 정신은 동서양을 관통하는 새로운 탐험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6. 불꽃같은 생을 마치다.

 

알렉산더는 통합을 위한 상징 및 상징적인 용어를 선택하는 데 대단히 신중했습니다.

그는 시민과 군인들을 ‘동료(Companion)’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그저 형식적인 호칭이 아니었습니다.실제로 알렉산드로스는 동료들과 함께 전쟁터에서 먹고 잤으며, 누구보다 앞장서서 전투에 참여 했습니다. 동료들과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치기도 했습니다. 또한 수천 명의 병사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동료를 잃었을 때, 알렉산더는 아킬레스가 파트로클루스를 위해 눈물을 흘렸듯이 크게 슬퍼했습니다. 알렉산더는 동료들은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맹세했고, 모두가 그 맹세를 믿었습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은 인더스 강 유역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원정에 나선지 10년이 지나자 군사들이 향수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군사를 돌려야 했습니다. 1년 후인 기원전 323년, 그가 그만 열병에 걸리게 되었고, 결국 그는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알렉산더 대왕은 죽고 그의 제국은 분열되었지만 그의 업적은 동서양의 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정복지마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웠고, 이곳에 그리스의 학자, 문인, 예술가들을 살게 하여 그리스 문화를 널리 전파시켰습니다. 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스스로 페르시아 왕녀와 결혼하고, 마케도니아 군사들을 페르시아 여인들과 결혼시켰습니다. 세계 시민주의(세상 모든 사람을 동포로 여기는 생각)를 강조하고 동방의 문물도 받아들였습니다.

알렉산더의 개척 정신과 그리스 문화를 동방에까지 확산시키겠다는 굳은 신념이, 그리스 문화와 동방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를 탄생시키게 된 것입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그 분량에서 쉽게 읽혀지는 책은 아닌것 같다. 하지만 2500년전 시대를 풍미했던 다채로운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 보는 즐거움과 그 유익이 책의 분량을 극복하고 남는 것 같습니다. ^^

 

그리스 팔랑크스, 영화 300의 팔랑크스,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마지막으로 팔랑크스를 직접 보게 된다면 이런 공포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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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교양 교양인 시리즈 4
박석무 지음 / 한길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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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茶山의 하늘을 바라보다>

 

 

지난 2016년 9월 세계경제포럼은 OECD 국가 중 가장 부패정도가 심한 11개 국가를 선정했는데, 우리나라가 9위로 포함되어 있었다.

국제투명성기구(TI)의 2016년 부패인식지수(CPI) 평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76개 국가 중 52위로 아프리카의 르완다보다 낮은 수준이다.

뉴스에서 공직자의 비리를 자주 접하다 보니 이제 새삼스러울 것이 없이 둔감해 지고 있다. 한강의 기적을 일군 나라, IT강국, 국민소득 3만불의 선진국 진입을 이야기하는 나의 조국이 부패에 대한 영역에서는 중·후진국 수준인 현실에서 다산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다시 생각해 본다.

 

목민심서는 어진 일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결과나 효과가 나온다는 다산의 실학적 주장이 담긴 명저이다.

부패가  극에 달한 조선 후기 지방의 사회 상태와 민생 문제 해결을 위해 각 지역에 부임한 고을 수령이 마음에 새기고, 지켜야 할 일을 모아 48권 16책으로 남긴 것이다.

다산은 올바른 목민관이란 백성들의 생활을 세심히 관찰하고, 그들의 문제를 알아서 정성껏 보살펴야 하며, 사랑과 애정으로 백성을 돌보아야 할 것을 제시했다.

애민을 실천했던, 노력하는 천재인 다산은 정조와의 어수지계로 승승장구 벼슬길이 트이기도 했지만, 숱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

다산은 세상을 고치고 바꾸기 위해 힘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알아야 한다고 했다.

다산은 열심히 공부하여 스물두 살이 되던 해 초봄에 진사과에 합격해서 학자임금 정조와 첫 대면을 하는 영광을 안는다. 높은 지위에 오르고 높은 수준의 학문에 이르러야 자신이 열망하는 일들(애민)을 제대로 실행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끝까지 과거공부에 매달리고 최선을 다했다.

출세를 위한 출세욕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고 싶은 간절한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다산은 게으를 수 없었던 것이다. 진보 노선, 변혁의 방향, 세속적인 만족과는 다른 한 단계 높은 새로운 추구, 그러한 변화 욕구는 다른 새로움에 마음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것을 알아내고 뭔가 색다른 것을 얻어내려는 열망에 다산은 서학(西學)에 깊이 빠지게 된다. 천주학으로 인해 서양사상을 섭렵해 다산 사상의 폭이 넓어진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반대로 쓰라린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다산은 암행어사 시절 궁중 어의(御醫) 출신으로 권세가 막강했던 강명길군수와 임금 가족의 묏자리를 잡는 지사(地師)출신으로 왕실과의 유대가 깊은 김양직현감의 탐학스런 행위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이들을 비호하는 조정 대신들이 가로막았으나, 다산은 “법의 적용은 임금의 측근부터 시작해야 하며, 민생을 소중하게 여기고 국법을 존엄하게 해야 한다”면서 다시 상소를 올려 탐관오리들을 준엄하게 의법처리토록 했다.

또한, 황해도 곡산 도호부사로 부임했을 때 관리의 불의에 항의하다 죄인으로 몰린 이계심사건에 대해서, 중앙정부의 대신들이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조정의 분위기도 주동자 몇 사람은 죽여야 한다고까지 합의한 사건인데도 다산은 양심과 법에 따라 무죄를 선고하고, 오히려 이계심의 의로운 행위를 극찬까지 했으니 220년 전 봉건왕조 절대군주주의 시절에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다니 다산의 강직함과 정의로움,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본다.

 

천부적인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다산은 정조라는 현명한 군주를 변혁의 주체로 여기며 역사의 발전을 도모했다. 보편적이고 고유한 민족문화를 끌어올려 공정하고 진실되며, 세상에서 압박받는 백성들이 정당한 삶을 살아갈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것이 그가 하늘에 그린 그의 세상이었다.

재상의 재목을 알아주던 정조는 왜 그렇게 갑자기 새상을 떠나야 했나? 정조 같은 군주는 다시 나오지 않았고, 채제공 같은 후원자도 다시 나오지 않아 그의 개혁의지는 끝내 좌절되어 현실정치에 반영될 수 없었다.

하지만 다산은 아픔과 시름에서 벗어나 진정 해야 할 일을 찾았다. 그는 마치 뒷세상을 기다리듯 묵묵히 길고도 긴 저술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예리한 비판정신을 지닌 학자답게 자신의 처지는 자신을 둘러싼 문제의 해결로 종결되지 않고, 사회적 모순과 시대적 갈등이라는 본질적 문제로 해결할 수 있다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산은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접근을 통해 모순과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했다.

18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쉰일곱 살의 다산은 유배생활에서 지친 심신의 노고를 풀기보다는 일흔 다섯 살로 영면할 때까지, 유배지에서 구상하고 계획했던 그의 사상과 철학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당대의 석학들과 새롭게 교우하면서 높고 깊은 학문적 토론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산의 삶의 모습은 세상을 향해 다시 날개 짓 하는 인생 2막에 의미와 도전을 준다.

 

박석무저자의 책은 다산에 대한 많은 연구와 고뇌가 있는 책이다, 다산의 삶에 대해 깊이 알기를 원하는 독자는 일독을 권한다, 다만, 가끔 저자의 생각이 지나치게 서술되어 있고, 잘 사용하지 않은 단어로 본인의 심경을 토로하는 부분은 살짝 거슬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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