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피용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 국제도서전에 갔을 때 일입니다. 열린책들 부스에 들러 <마야꼬쁘스끼 선집>을 샀습니다. 책을 판매하시던 어떤 분이 베르베르의 신작이 곧 나온다며 <파피용>을 살짝 알려주셨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 분께 감사말씀드립니다. 만원도 안되는 책을 체크카드로 구입하느라 민망하던 찰나라서 그 때는 감사하다는 말을 못 전했습니다.

아무튼 이번에 구입 예정한 책은 <파피용>은 아니었습니다만 지인이 선물로 주신 책이 이미 산 책인지라 <파피용>으로 바꿨습니다. 이렇게 예정없이 책을 읽게 되면 확률은 50%가 됩니다. 그 확률은 책을 읽은 소감과 감성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 책을 누군가에게 어떻게 권할 것인가에 있어 제 태도의 순진성을 가름하는 것입니다. 결론만 말하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다른 책을 좀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중키에 머리는 민둥산인 데다 두꺼운 안경을 맞춰 낀 두 눈은 허공을 향하고 있다. 그는 잉크가 말라 버린 펜과 어딘가 조금씩 고장 난 계산기들이 주머니 가득 들어 있는 흰 가운을 절대 벗는 법이 없었다."

이브 크라메르의 인상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저는 차라리 뫼비우스의 일러스트가 없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일러스트까지 통채로 들여와(수입해) 가공해서(번역, 편집, 제작) 파는(유통) 상황인지라 일부를 도려내거나 우회적으로 돌리는 일이 어려울 수 있겠지만 몇 개 작업을 뫼비우스와 공동으로 한 베르베르의 책은 가면 갈수록 별로인 것 같습니다. <개미> 시절의 감흥과 설레임과 그리고 벅찬 상상력을 제게 계속 주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제게도 탓이 있습니다. <개미>를 읽고 흥분하던 시절은 20대였고 이젠 저도 나이먹고 때가 묻은 '철들고 싶지 않은 어른'이니까요.

각설하고 SF가 주는 상상력과 입에서 단내 나도록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어야 하는 그런 감동은 이젠 없다는 말입니다(물론 베르베르는 온전한 의미에서 SF작가는 아닙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까. 토요일 저녁 찜질방에 앉아 책장을 넘기며 무척 곤란했습니다. 읽자니 곤란하고 안 읽자니 그 망망대해의 찜질방에서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 다시 이브 크라메르도 돌아갑니다. 그의 인상은 이랬어야 했다(구체적으로 말하면 뭔가 찌질이 냄새가 나는 듯했어야 했다)를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텍스트만 있었더라면 좀 더 풍부히 그의 캐릭터를 상상하고 상황에 따라 나름대로 구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원치 않던 일러스트가 들어가는 바람에 그의 캐릭터와 텍스트상 안내가 일치하지 않은 느낌입니다. 명실이 상부하지 않게 다가온 것이지요. 적어도 제게는.

이브 크라메르의 이미지는 이 책을 읽는 제게 무척 중요했습니다. 엘리자베트 말로리나 사틴의 이미지는 일러스트가 있건 없건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가능성을 줍니다. 하지만 주류권력의 비틀어진 아웃사이더 형인 이브 크라메르는 좀 다르다고 할까요?

다음으로 번역과 문화적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번역을 전문으로 하지 않는 이상 잘했다, 못했다는 말할 순 없겠지요. 하지만 이브 크라메르의 엘리자베트 말로리의 권력관계가 번역에서 굉장히 우스꽝스럽게 표현됩니다. 대개 외화나 외서 번역을 보면 남성은 여성에게 아랫사람에게 쓰는 존대를(사랑하오, 무엇무엇을 했으면 좋겠소. 따위의 어투겠지요), 여성은 남성에게 일상적인 존대를(~요, ~까요. 따위겠지요)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다가 둘이 섹스라도 하고 나면 금새 반말투성이가 됩니다. 어쩌면 여-남 캐릭터의 섹스 여부는 둘의 대화체만 봐도 알 수 있을 지경이지요. 이 책은 그런 상투성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물론 둘이 갑자기 반말을 치고받는 상황은(그렇게 번역한 상황은) 섹스의 여부는 아닙니다만 충분히 그렇게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지요.
한국어를 쓰는 사람을 봐도(한국인을 봐도) 남성이 자신의 이성 애인에게 무엇무엇 하오. 이래저래 하시겠소. 하는 조선스런 말투를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 있을 수 있겠네요. 20세기 중반에 결혼한 부부 내지 그런 세대를 풍자하는 커플들의 장난 말입니다. 판타지를 클래식으로 애써 돌변하게할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제 책갈피는 아직 233쪽에 꽂혀 있습니다. 더 진도를 내야 할 지, 아니면 다른 책을 앞질러 읽고 뒤에 읽어야 할지 제 맘은 아직 오리무중입니다. 파피용은 계속 새로운 행성을 향해 날아갈텐데 내 맘은 아직 지구에 남아 있는 탓일는지요.

댓글(3)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sdgghhhcff 2007-07-23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파피용은 실망하신 분들이 꽤 되더군요.. 무힉님도 실망하셨군요..
전 아직 안읽어 봤는데 이것참.. 망설여지게 되네요..^^
리뷰 잘 보고 갑니다.

무히끄 2007-07-23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 실망이라기보다는 그저 멍합니다. 베르베르를 좋아하시면 소장할 가치는 있지요.

무히끄 2007-07-26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아아아.
어제 집에 일찍 들어가 할 일이 없길래 나머지도 마저 읽었어요. 어흑.
완실입니다. 완전실망. 철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