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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규모의 의학 - 루돌프 비르효, 자유주의, 공중보건학
이안 F. 맥니리 지음, 신영전 외 옮김 / 건강미디어협동조합 / 2019년 9월
평점 :
사회적 의사social doctor를 주제로 글을 썼던 적은 어언 17년전 로망이던 필리핀에서의 반년간의 해외봉사를 마치고 썼던 후기글에서였다. 학부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였음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바깥으로만 돌며 교양수업만 즐거워하다 졸업하고나서 국제개발협력 ODA관련 현장경험에서 빈곤국의 현실속에서 지내며 세상돌아가는 큰 그림을 조금이나마 맛보았다고 할까? 한나아렌트가 말하는 인간의 조건 3가지 중 인간다움을 누리지 못하는 활동이라 homo가 아닌 animal laborans라고까지 했던 바로 그 '노동'으로 악명높았던 기관에 순전한 객기로 자원하였던 그 때에 살아돌아와서 남긴 8기 단원 종결보고서에 실린 나의 글의 마지막은 사회적 의사가 필요함을 느낀다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회적 의사라고 할만한 사람들은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체게바라와 한 사람 정도 더 꼽자면 장지글러가 아들에게 쓰는 형식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접한 비극의 아옌데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체게바라는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로 의사에서 혁명가가 되기까지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된 친구와의 여행이 담긴 영화에서 그가 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속으로 그가 가진 의술을 넘어서 성큼성큼 다가왔는지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인상깊게 말하고 있었다.
이 책 <넓은 의미의 의학 Medicine on a grand scale>에서 주인공격인 비르효는 똑똑하였지만 학비가 없어 공부에 어려움을 겪을 뻔 하기도 하고, 남들이 인생을 걸어 한 가지에 집중하고도 하나의 이렇다할 결실을 맺지 못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의사, 병리학자, 인류학지, 정치가, 편집인 등의 다양한 타이틀을 달고 각 분야에서 인상깊은 활동으로 역사에 노크를 했다. 그러나 원하는대로 모든 것이 술술 풀릴 수만도 없고 그렇게만 가는 것이 한 사람, 특히 천재라 일컬어지는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역경도 있는 법이라서 그런지, 그에게는 커다란 산과 같은 존재가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우리가 이미 십대 때 역사서에서 익히 접했던 인물인 비스마르크로 한 시대를 주름잡는 산과 같은 인물이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고 할 때, 그는 어떤 좌절감을 느꼈었을지? 이 책은 저자의 엄정한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철저한 고증의 산물로 그와 비스마르크의 비교적 알려진 일화인 소세지 결투 에피소드는 나오지 않지만, 그 에피소드에서 전장에서 살아온 비스마르크와 칼로 싸운다는 것은 스스로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비상한 그가 모르지 않았던 터인지라~ 그는 그의 분야가 아닌 자신의 분야인 세균에 감염된 두 개의 소세지를 그에게 역으로 제안하여 이 걸로 결투를 대신하자고 했는데, 그를 신뢰하지 못한 비스마르크가 결국 껄껄 웃으며 결투제안을 물리게 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 그와 당대의 실권자인 철의 재상과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책에서도 그는 "나의 분야에 뛰어든 난입자"라며 비스마르크의 표현그대로 등장한다.
그가 비스마르크의 눈엣가시가 되기까지, 불편함을 느끼려면 모름지기 어느 정도 세력을 형성해야 그의 결투상대가 될 수 있을 터였을 것이기에 그의 처음은 어디였을까? 거슬러 올라가 보자. 체게바라에게 친구와의 여행이 그 계기가 되었다면, 우리의 주인공 비르효에게는 일종의 국가프로젝트로 맡은 상부 실레시아 혹은 북부 실레시아로도 알려져있는 다소 열악한 지역의 현장조사가 그 계기로 작용했다. 그 지역은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그 자신의 표현대로 어떤 불쾌한 공기, 그가 miasma로 표현했던 더럽고 냄새나는 그 지역을 가득히 메우고 있는 지역민들의 일부와도 같이 되어버린 그 "공기"를 마주하고 잠재력이 있었을 지도 모르는 그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분노로 인해 "의학" 너머의 세상을 마주한다. 얼마전 인상적으로 보았던 미국 대법관 긴스버그의 일생을 다룬 <세상을 바꾼 변호인 on the basis of sex>에서 그녀가 우상으로 여기던 전설의 변호인을 실망스럽게 만나게 된 장면에서 그녀의 열정에 찬물을 부으며 그 동기를 테스트하려던 그녀의 우상에게 그녀가 들려준, "무엇인가 느끼는 것이 출발점"이라던 답변처럼 말이다.
실레시아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불쾌함과 안타까움과 분노마저 느꼈던 비르효는 그가 가진 과학의 힘으로 지역의 위생을 관리하고 이를 체계화하여 마침내 그 지역을 '살만한' 곳으로 바꿨던 경험은 후에 결코 연민의 대상이 아닌 당대의 대도시 베를린의 거주민에게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당대의 "밤거리 아가씨들"이라고 불리었던 여성들은 지금의 의미가 아니라 하수시설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탓에 오물을 스프리강으로 밤시간에 나와서 버려야만 했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거기서도 나타나듯 최첨단을 달리는 베를린이라 하여도 누군가 체계적으로 정비하지 않으면 여전히 그대로일 골치아픈 대도시의 하수문제에서도 그의 능력은 발휘되었다. 기존 대도시의 경험들의 수혜를 입고 귀족 출신이 아닌 그를 그의 신분만으로 막아서지 않을 만한 다른 귀족출신 동업자와 함께 성공적으로 이 대대적인 프로젝트를 오물로 자연비료로 사용해왔던 대형농장주들의 대대적인 반대에 부딪혀 쉽사리 이룬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결국 그는 해내었다. 지하수의 양에 비례하여 영유아 사망률이 높아진다는 과학적 결과의 적재적소에 맞는 증명의 덕도 보았지만 덕분에 베를린 사람들 마저도 생활의 혁명이라고까지도 할 수 있는 변화를 맛보게 되었다.
그렇게 의료인들의 직업적 지위를 고양시키고 의료수가 상승과 의료행위의 무자격자 제한 등 늘 진보적이라고 볼 수 만은 없는 의료전문직의 권익확보에도 앞장서고 의회에서도 연설하고 <의료개혁>이라는 발행물까지 시리즈로 앞장서서 내던 그는 어느 순간 싸움을 멈춘다. 그가 의욕적으로 발간하던 의료개혁의 마지막 호에서 그는 우리는 싸움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 이슈를 내려놓는다고 말했지만 저자 맥닐리 교수의 그의 표현대로 냉전이 막 끝나던 지금으로부터 근 한 세대 전의 시점에 최초로 작성되었던 그의 학부시절 글인 이 책은 후에 손질을 거쳐 발간된 100p가 되지 않은 비교적 짧은 글이라 할 수 있다. 비르효에 대해서 알 지 못했던 한 일반인이 공역자로 삼아주신 교수님 덕분에 역사에 묻힌 한 독일 천재의사에 대해 알게 되고,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그의 팬이 되기도 했었는데 그런 탓에 저자의 결론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기도 했었다. 번역자는 저자의 의견에 꼭 동의를 해야하는지라는 질문을 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작년 여름 노회찬님이 그렇게 황망히 가셨던 폭염의 한 가운데에서 만났던 한 옛날 독일 의사선생님은 올해 다시 만나고 보니, 그렇게 팬이 되었던 마음은 한소끔 물러가고 교수님 말씀대로 어느 정도 100% 다 흠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다고 100% 다 폄하해서도 안 될 것이기에 적정한 거리에서 결론을 다시 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과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인하여 이후에 등장한 역사의 순환을 그에게 책임을 지우는 듯한 뉘앙스는 좀 억울하다는 생각을 떨치기는 어렵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치의 등장이 바이마르의 탓이 아니듯, 비르효는 그의 분야와 그의 전문인 의학을 넘어선 인류학 중에서도 체질인류학, 아직까지도 의료인들에게 쓰여진다는 삼각법이라던가, 슐레이만과 동업으로 트로이유물을 발견한다던가 하는 행위에서도 나타나듯 그는 이론과 학문에만 머무르기엔 너무도 심장이 뜨거웠던 한 인상적인 인물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1848년의 혁명에도 참석했지만, 위험지대 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점에서 서포트를 하던 젊은 시절의 비르효의 포지션처럼 타협하지 않고 앞서나가다 죽음으로 귀결되느니 보다는, 십대 때 읽었던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상>에서 서울에서 전학 온 주인공이 엄석대의 독재와 부정에 저항하다 결국에는 그에게 넘어간 것처럼은 아닐지라도 주어진 지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그를 따르는 다른 의사들에게 확보해주었다고.. 그가 <질병의료보험>의 표결에 대해 의회에 있던 시절, 눈에 띄게 옹호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지적에 대해 앞의 순전한 추측으로 넘겨짚어본다고 한들, 그것이 꼭 잘못만은 아니지 않을까? 그것이 타협이었든 혹은 지나친 추측이었든 간에.
from 말하자면 제일 처음 한국 독자:)
지은 쓰다.

의학은 하나의 사회과학이며, 정치는 거대한 규모의 의학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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