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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이는 풀잎이다 - 풀잎그림책 1
조민경 그림, 안도현 글 / 태동출판사 / 2002년 2월
품절
처음에 제가 만복이를 만난 건 다 헐어빠진 중고책들 틈새였습니다.
마치 풀잎 요정과 같은 납작코 아이의 귀여운 얼굴이 제 눈에 화~악 들어왔습니다.
안도현 시인이 글이라는 것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내용을 한번 흝어보았지요.
찢김에 제본도 흔들려 있었지만 이 책은 단박에 제 마음을 휘어잡더군요.
책장을 열어보니 참 순박한 장난꾸러기같은 녀석 둘이 들풀 많은 강둑에서 함박 웃고 있습니다.
강물도 슬기와 만복이를 따라가요
슬기와 만복이가 손에 손을 잡고 가니까,
강물도 강물끼리 손에 손을 잡고 흘러가요.
슬기와 만복이가 또박또박 발을 맞추어 가니까,
강물도 강물끼리 또박또박 발을 맞추어 흘러가요.
슬기와 만복이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가니까,
강물도 강물끼리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흘러가요.
동화가 아니라 꼭 시같지요? 이 글을 쓴 작가가 안도현 시인이라 댓구와 운율이 예쁩니다.
책 전체의 내용이 엄마가 읽어주기는 힘들지만(^^ ! 반복은 힘들어...) 아이는 들을 때에 매우 좋아합니다.
(아이들의 입맛 - 구간 무한반복)
슬기가 허리가 늘씬하게 생긴 멋진 방아깨비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만복이가 새치기로 등뒤에서 손을 뻗어 먼저 발견한 슬기보다 빨리 잡아버립니다.
슬기는 약이 올랐지만 방아를 찧는 방아깨비를 보며 마음이 풀렸습니다.
예전 이제는 80이 넘으신 저희 할머니께서 방아깨비를 잡아서 제게 주시던 생각이 납니다.
뒷다리를 잡고 있자면 뒷꽁무니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방아을 찧었던 모습이 지금도 또렷이 떠오릅니다.
옛날 한 번 가면 엄마가 속상하도록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했던 그 정겨운 할머니 집의 모습과 함께...
수돗가의 노란 양푼 대야, 할머니 집으로 올라던 가파른 언덕길, 동네 꼬마들과 여우야 여우야를 하며 놀던 층층계단들,
바닥이 깊었던 부엌에서 제가 갈 때마다 늘 사두셨다 한 숟가락씩 떠서 입에 넣어주셨던 참깨의 그 고소한 맛....
오직 할머니 집에서만 볼 수 있었던 명랑 만화책들...
동화책 한 페이지에 이토록 많은 추억이 꼬리를 물고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많은 추억을 뒤로 하고 페이지를 넘기면 슬기와 만복이가 동화의 분위기와 똑닮은 잔잔하고 넓은 강을 보며 나란히 앉은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역시 나오는 용서할 수 있는 반복! (글이 넘 예쁘니까^^)
슬기와 만복이가 나란히 앉으니까,
강물도 강물끼리 나란히 앉았어요.
슬기와 만복이가 나란히 앉으니까,
강 건너 푸른 들판도 들판끼리 나란히 앉았어요.
이제 이 동화의 클라이맥스가 시작됩니다.
드디어 만복이의 어깨 위에 메뚜기가 날아와 앉았던거죠.
절대로 크게 읽어줄 수 없는 대사들이 나옵니다.
제가 속으로 숨을 참고 긴장감있게 속삭여주니까 아이도 바짝 긴장해서 숨을 참고 듣더라구요.
"만복아, 움직이지 마."
"왜 그래?"
"네 어깨 위에 메뚜기가 날아와 앉았어."
"그럼 어서 잡아야지."
슬기는 메뚜기가 날아갈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 했어요.
"만복아."
"왜?"
"움직이면 안돼."
"슬기야."
"왜?"
"움직이지 않을게."
슬기는 혼자 속으로 말했어요.
'만복이는 풀잎이다.'
'만복이는 풀잎이다.'
'만복이는 풀잎이다.'
나지막히 속으로 말하는 슬기의 말에서, 너무너무 예쁜 미소를 짓으며 웃는 만복 풀잎의 얼굴에서 평온함과 평화가 묻어 나옵니다. 원래 사람과 자연은 이렇게 서로의 일부분으로 평화롭게 지내야 하는건데....
비단 마지막 페이지만이 아니라 이 책 전체에서 풀잎이나 메뚜기와 같이 아이들은 순수한 자연 그 자체입니다.
도시에서는 '잔디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로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오히려 두드러지게 하지만
무던한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풀섶을 헤치고 다니는 만복이과 슬기는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 '자연'이네요.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의 마음에 한줄기 산들바람이 불어 풀내음이 전달되었음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