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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심연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랑수아즈 사강/김남주 옮김 “마음의 심연”
‘Les Quatre Coins du Coeur’ 이 작품의 원제다. ‘마음의 네 귀퉁이’ 정도로 직역이 가능한데 ‘마음의 심연’이라는 한국어 번역본으로 탄생했다. 번역가의 질문에서 시작해 본다. 그것이 소설의 주제 의식과 맞아떨어지며, 재밌는 해석을 보여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번역가의 말처럼 이 흔한 연애 소설을 통해 사강은 “연애는, (혹은) 사랑은 조건이나 물질, 심지어 육체가 아니라, 마음에 달린 거라고, 우리 자신도 몰랐던 그 심연에 다가가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품해설 中)
심연이라는 단어를 상상하면, 망망대해의 바다가 떠오른다. 이 암흑 덩어리의 바다는 결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인간을 유혹한다. 위험을 감수한 자만이 심연에 다다를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심연은 도달 불가능하다. 바다는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절대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무한! 사랑이 심연에 다가가는 것이라면, 사랑, 곧 심연이란 말하는 방법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는 방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사강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전에 다른 조건들을 살펴보자. 사랑은 조건이나 물질, 심지어 육체에 달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물음의 전제는 이 소설 속 인물들의 상황적 배경을 가늠케 한다. 사랑에 대한 통념이 있고, 그 통념을 둘러싼 인물들이 통념이라는 조건들 속에서 사랑을 제약받는다. 이것이 이 소설을 둘러싼 주요 갈등이다. ‘뤼도빅’은 치명적인 교통사고 이후 오랫동안 정신병동에서 지낸다. 뤼도빅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주인공처럼 사랑을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문제로 여기던 존재였으나(43p), 이 사건 이후 아내 마리토르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다.
이 부부 사이의 관계는 필연적 권태감을 넘어선다. 뤼도빅은 사람 이하의 존재로서 취급받는다. 가족들도 마찬가지. 크레송가 사람들이 ‘뤼도빅’이라는 이름 대신 ‘그’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이 사실에 대한 우회적 표현일 뿐이다. 이 집에는 앙리 크레송과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산드라, 산드라의 동생 필립 그리고 뤼도빅의 아내 마리토르가 함께 거주한다. 이 부유한 가족의 일상적 분위기는 사랑이란 물적 조건으로 충족될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경멸과 무관심, 겉치레와 허세만이 이 가족의 말과 말 사이를 부유한다.
‘뤼도빅’이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가족들이 일종의 사회적 통념/법칙 안에 머무르는 존재들이라면, ‘뤼도빅’은 사회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한 존재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그는 자기만의 존재방식으로 세계에 머무른다. 뤼도빅이 자신이 서비스를 제공받은 직업여성에게 꽃을 보내며 도리어 아버지에게 반문하는 장면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다만, 어디까지나 ‘뤼도빅’ 역시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앙리 크레송은 파티를 주최하고자 하는데, 공개적인 석상에서 아들의 정상적인 면모(타자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관점에서)를 확증하기 위함이다.
이때 제3의 존재가 등장한다. 마리토르의 어머니인, 파니라는 여성이다. 파니는 딸 부부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크레송가에 초대받았으나, 여기서 가장 위태로운 사랑의 금기에 균열이 발생한다. ‘뤼도빅’이 ‘파니’로부터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 아내의 어머니에게 말이다! 연상 연하의 사랑이라는 사강의 작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복잡함을 넘어서는 상황이 여기서 펼쳐진다. 반대로 파니는 어떨까. 파니는 뤼도빅이 자신의 딸을 비롯한 이 가족들로부터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함을 알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어린 남성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라기보다 오히려 보호해주어야 할 존재일 따름이다. 다만, 파니는 남편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마음이 흔들린다.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사강은 파니의 감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 …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 역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는 그렇게 금방 웃을 수 있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지속될지 얼마나 진지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 이리저리 갈팡질팡 흔들리고 있었다. 유일하게 분명한 감정은 행복하다는 것뿐이었다.”(236p)
소설의 절정에 다다르고 있다. 다만, 이 소설은 파티의 직전 상황에서 끝맺음 된다. 사강은 끝을 생략한다. 나는 바로 이 지점이 사강이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랑은 덧없다. 사강은 작품들을 통해 일관성있게 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강은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뤼도빅과 파니는 사랑이라는 것이 모든 통념을 가로지르는 무엇이라고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 끝은 결코 알 수 없다. 사랑 자체가 심연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강이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사랑’이다. 끝의 생략이란 열린 결말이자 닫힌 결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