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아들의 눈과 마음으로 그 아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없이 사랑스러워 보이더이다. 시모의 눈으로도 보았습니다. 참으로 아깝고 탐이 나더이다. 같은 여인의 눈으로도 보았습니다. 그러니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한없이 가여워지더이다."-26쪽
"젊음은 모든 여인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지만, 저 나이에 갖는 아름다움은 오로지 남편의 애정이 만들어 준단다. 사내들은 영원히 아름다운 부인을 소망하면서도 그 소망이 제 하기 나름인 것을 몰라."-57쪽
"에잇! 왜 이렇게 더워!"
분명 소리를 지른다고 질렀는데 입 밖으로 나오지는 못하였다. 재신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종이 몇 장을 겹쳐 잡았다. 그리고 그녀 옆의 책상에 걸터앉아 그것을 부채 삼아 신경질적으로 부쳤다. 분명 자신을 향한 바람이었는데 대부분이 그녀를 향해 날아갔다. 그는 차마 아래를 보지 못하고 멀리 창밖을 보았다. 매미가 따갑게 울어 대는 게 여간 못마땅한 게 아니었다.
"너, 아름답더라."
비록 밖으로 내뱉지는 못해도 혼자 중얼거려 보았다. 여장을 했을 때, 조금도 사내 같은 티가 나지 않았다. 오로지 여인이기만 한 듯하여 마음에도 없는 퉁명스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답더란 말은 할 수 없었기에, 그런 식의 표현 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창밖을 향해 있던 재신의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왔다. 어쩐지 몇 년 만에 보는 얼굴인 듯하였다. 엉뚱한 곳을 향한 재신의 부채질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내게는 너로 인해 쓰고 지운 글이 참 많아. 언제쯤 그 글이 멈춰질까? 얼마나 지나야 네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보고 싶다..." -98쪽
어록을 뒤적여 읽던 왕의 표정이 어두운 촛불을 받아 차갑게 굳어졌다. 또다시 긴장하여 침을 삼키는 그녀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왕이 한문으로 쓰인 한 구절을 번역하여 읽었다.
"어디 보자. ‘애석하도다. 백성의 곤궁함이 중한데, 자질구레한 논쟁이 앞서면 어찌하느냐. 마땅히 구휼을 먼저 살피도록 하라.’ 넌 정말 고약한 신하로다. 내가 언제 이런 말을 했느냐?"
정색을 하고 묻는 왕 앞에서 윤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아, 저, 그럴 리가..."
"이 당시 나는 ‘그따위로 일을 처리해 놓고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더냐! 백성들이 지금 다 죽어가는 판국에 모여 앉아 입만 나불거리고 있다니! 당장 녹봉 챙겨 가는 값은 해라.’이렇게 말하였도다."
윤희는 안절부절못하고 왕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런데 입 꼬리에 미소가 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그제야 겨우 농담임을 알아차리고 장단을 맞춰 농담처럼 말을 하였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보다는 조금 더 심하셨사옵니다."
왕에게서 웃음이 터졌다. -132쪽
"네게만 살짝 말하는데,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들을 상대하려면 말에서부터 기를 확 죽이고 들어가지 않으면 승산이 없는 싸움이 많아. 내 말은 원래 점잖기 그지없지만, 어쩔 수 없이 그리 말할 수밖에."
"방금 하신 윤언도 소신이 문장으로 잘 엮어 보겠사옵니다."
"어떻게 엮어 볼 셈이냐?"
윤희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술술 말하였다.
"노련한 노신들이 나를 보좌하는 데 기여하는 바가 크다. 나 또한 스스로를 더욱 갈고 다듬는 데 노력을 늦추지 않겠노라. 이 정도면 어떠하옵니까?"
"하하하! 그 정도면 실로 사기꾼이라 할 수 있도다." -134쪽
그대가 용이 되고자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대가 헤엄쳐 놀 수 있는 풀이 되겠소. 그러니 그대의 바람이 곧 나의 바람이오.-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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