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담하건데, 네 부하들 모두 죽는다." 마상여가 쏘듯이 보았다. 그러나 록흔은 입귀 늘리고 넉넉하게 웃었다. "물처럼 흘러가는 세상사. 둑은 고요하고, 여울은 들끓으며, 대해는 넓다. 때론 바위 만나 산산이 깨지기도 할터. 장담은 이르지 싶은데." 록은흔 수연도를 칼집에 재웠다. "마상여, 나를 꺽는다면 금야(今夜)로 한해 놓아주마." "금야?" "포획이 소임이니 오늘은 놓아줘도 내일은 또 쫓아야지." 단아한 미소였다. 마상여는 어연번듯한 적이 마음에 들었다.-124쪽
"오늘 죽을 목숨이나, 이름이라도 알자." 죽을 목숨? 웃음이 절로 나왔다. 록흔은 마도굴에서 사람의 명이 질기다는 것을 배웠다. 스스로 버리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살아지는 것. 하여 두려울 것이 바이 없었다. -126쪽
"누구냐, 너!" "알려하지 마라. 그저 그림자이니." 록흔은 서늘한 눈으로 반야희를 내려 보았다. '호분중랑장, 혹은 무영랑...... 연은 연록흔의 그림자일 뿐. 주인이 잠들면 한밤주에 나도는 영혼보다 못한 존재거늘. 그리운 꿈속에조차 반듯한 자리가 없나니.'-194쪽
류에게 물으니, 곧 해가 돋는대요. 얼마나 머물겠느냐 눈물바람 하였더니, 달이 그린 그림은 염정(炎精)에 태워 먹빛 어둠 치우듯 걷어 버린다고 해서 입술 끝만 물었지요.
사연 아는 류인지라 한숨 높이 내쉬니 흐린 구름 몰려와 해를 가려 주네요. 잠드신 임 모습에 눈물 떨쳐 보지만 달 그림자였으니 저 일광 아래서는 존재할 수 없네요.-242쪽
"폐하께 무슨 되를 지으면, 낯가죽을 바쳐야 합니까?" 룩흔은 곧은 눈으로 물었다. 황제의 중랑장으로서, 나머지 네 중랑장에게도 처짐 없는 기세였다. 수면을 뚫고 침잠하는 달빝인 양 일호도 흔들리지 않았다. "왜, 걸리는 게 있나?" "짚이는 바는 없으나 미천한 제 면상을 이리 쥐고 계시니, 내드려야 하는 것인지......" 미처 마치지못한 말은 록흔의 입 안에 있었다. 가륜이 그 입술을 눌러 침묵케 했다. 손가락이 닿은 대로, 그대로, 불길이라도일듯 뜨거웠다. . . . "폐라, 신 연록흔, 그만 물러가겠나이다." 록흔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다시 허리를 꼿꼿이 폈다. 이내, 뒤돌아서 문을 향해 나가는데 목이 뜨끔거렸다. "신의를 저버리거나." 막 록흔이 문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가 그녀의 등을 찔렀다. "거짓으로 대했거나." 척추게 칼끝이 박힌 듯했다. 미처 듣지 못한 답이었다. 록흔은 멈칫 서서 눈을 감았다. "그게 낯이든 목이든, 믿음의 크기만큼 대가를 치러야겠지." 달 없는 밤에 모래 폭풍에 맞선 듯. 록흔은 눈귀를 바투 좁혔다. 입안에선 쇳기가 퍼졌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3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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