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 오후, 진흙 먼지를 뒤집어쓴 시골 마을의 오솔길에서 나는 몇 번이나 공중에서 줄타기를 하던 광대의 모습을 떠올렸다. 붉은 망코와 검은 가족신, 다듬어지지 않은 것 같은 야생의 미소와 자유롭고 거칠 것 없는 몸짓……. 가느다란 철사 줄 위에서 뜀뛰기를 하고 대날릴 때 그는 마치 산속의 영양(羚羊) 같았다. 나는 얼굴이 검고 매우 잰 남방 사투리를 쓰는 남자가 내게 던졌던 말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얘야, 나릉 함께 가자꾸나, 내가 줄타기를 가르쳐주마.-84쪽
지존하신 할마마마 황보부인이 돕지 않는 한 그들은 내 터럭 하나도 건드리지 못할 터였다. 나는 단문의 음침하고 우울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붉은 갈기를 가진 검은 말 위에서 활을 당겨 수리를 쏘아 맞추던 그의 위풍당당한 자태를 떠올렸다. 그러자 마음속에서 야릇한 시기심과 의구심이 치밀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나와 단문의 자리가 뒤바뀐 게 아닐까 몇 번이나 의심했다. 때때로 나는 순장당한 양부인의 말이 진실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나는 가짜고, 단문이야말로 진짜 섭왕이 아닐까. 나는 아무래도 진짜 왕이 아니며, 나보다 단문이 더 진짜 왕 같다고 생각했다.-1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