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을 수 없는 행운을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지금 가진 행운에 감사해야겠지요."-27쪽
지금 믿을 수 있는 단서는 기억보다는 기록이었다. 기억은 주관적이지만 기록은 객관적이고, 기억은 순간적이지만 기록은 영원하며, 기억은 혼동될 수 있지만 기록은 명확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61쪽
"생도청이 무엇하는 곳이냐? 평생을 화원으로 살아갈 소양을 닦는 곳이다. 화원이 무엇하는 자냐? 평생 나라의 녹을 먹으며, 위로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아래로 다스림이 골고루 미치게 하는 자이다. 보인다고 아무것이나 그려대는 잡놈을 어찌 화원이라 할 것인가?"-111쪽
윤복은 얼떨결에 홍도가 내미는 붓을 받아들었다. 제자인 자신에게 용안을 맡긴 스승의 뜻을 받드는 것이 아름다운 공모에 가담할 수 있는 길이었다. 모든 관례과 모든 허식과 모든 양식을 버린 그림.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그리는 순수한 행위‥‥‥. 거기에는 천한 화원도 지엄한 왕도, 스승도 제자도 없었다. 붓은 그리는 자의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고, 그려지는 자는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과감하면서도 섬세한 붓끝이 스쳐가는 화선지 위에 희미하게 주상의 표정이 드러났다. 웃는 얼굴을 그릴 것인가, 근엄한 얼굴을 그릴 것인가. 홍도가 붓을 양보한 것은, 자신이 주상의 웃음을 억지로라도 웃지 않는 표정으로 바꾸어 그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윤복은 달랐다. 그의 영혼은 전통에 속밖되지 않았고, 그의 손끝은 양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의 혼은 거칠 것이 없었고, 막힘이 없었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240쪽
"인간의 심성이 다르지는 않을 터, 짐이 행복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남을 행복하게 하겠는가. 하물며 행복하지 않은 왕이 어찌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겠는가 말이다. 스스로 행복함으로써 백성을 행복하게 하는 왕이 있어도 즐거운 일이 아닌가."-250쪽
푸르른 강물 위를 미끄러지듯 한가롭게 떠가는 놀잇배 한 척, 눈부신 차일 아래에 앉거나 선 사람들, 여인의 아름다움에 몸이 달아오른 사내와 무심한 듯 강물에 손을 담근 여인, 그 여인을 지그시 바라보는 사내, 생황을 부는 여인과 젓대를 부는 소년, 그리고 무심하게 먼 곳을 바라보는 늙은이.......-65쪽
"이 그림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그것은 색 때문이겠지요." "색이 이토록 시리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단 말이냐?" "색이 난잡하다는 것이 곧 색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증거입니다. 색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슬프게 하고 애통하게 하고 스산하게 하지 않는다면, 평상심과 중용의 도를 하늘같이 떠받드는 선비들이 그토록 극렬하게 색의 사용을 금할 이유가 없겠지요."-121쪽
"너는 나의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이었다. 네가 남자든 여자든 그것은 상관없었어. 나는 한 여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사랑했을 뿐이니까..... 고통은 어찌할 수 없는 남녀의 분별과 천륜이라는 굴레 때문이었지. 하지만 너를 마음에 품는 대가라면 고통마저 받아들일 수 있었다."-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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