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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스 - 2024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유영미 옮김 / 한길사 / 2024년 11월
평점 :
예니 에르펜베크의 장편소설 『카이로스』는 1980년대 말 동서독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 붕괴를 배경으로, 두 인물 카타리나와 한스가 보여주는 파괴적이고 복잡한 사랑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카타리나는 동독에서 자라온 젊은 여성이고, 한스는 서독 출신으로 34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가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강렬한 끌림과 동시에 상처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이어간다.
작품 속에서 “사랑은 마치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고, 때론 스스로를 찢어내는 행위와 같다”는 구절은 그들의 관계가 단순히 달콤하지 않고, 갈등과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도 끝내 완전한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과 상대방을 끊임없이 시험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역사적 사건은 두 사람의 운명과 사랑을 크게 흔든다. 에르펜베크는 “벽이 무너진 순간, 우리는 그동안 숨겨왔던 진실과 마주해야만 했다”고 서술하며, 외부 세계의 변화가 개인 내면의 복잡한 감정과 충돌하는 순간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 사건은 사랑의 열기와 함께 개인이 겪는 혼란과 분열을 동시에 드러낸다.
카타리나가 “나는 이 사랑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다시 묻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사랑이 자기 인식과 정체성의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힘임을 느낄 수 있다. 한스 또한 자신의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갈등하며,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사랑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인간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카이로스』는 단순히 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이 아니라, 파괴적이고 진실한 사랑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시대의 변화를 조명한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사랑이 언제나 아름답지만은 않으며, 때로는 우리를 가장 깊은 고통과 변화로 이끄는 힘임을 깨닫게 된다. 에르펜베크는 그리하여 사랑과 역사, 개인과 사회가 맞물려 돌아가는 복잡한 모습을 탁월하게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