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장선하 옮김 / 책만드는집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중학교 때 집에 있는 세로 글로 된 어니스트 헤밍웨이 전집으로 노인과 바다를 처음 접했었다. 원채 유명해서 끝까지 놓지 않고 하루만에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 책을 10년도 더 지난 지금, 사회인으로서 다시 읽는 기회를 가졌다. 고전이 특별한 이유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연륜을 더할수록 책을 더욱 깊이 음미할 수 있는 여지가 풍부해지기 때문인데 노인과 바다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노인과 바다는 그저 페이지 위에 떠있는 글의 조각들에 불과했다면 지금의 책에서는 내가 노인과 함께 책의 표지만큼이나 푸른 망망대해에서 청새치를 발견하고 있는듯한 기분이었다. 


작은 판형에 127페이지 분량이 말해주듯이 길지는 않다. 줄거리도 굉장히 간단한데  쿠바의 산티아고라는 노어부가 출항하여 84일 동안이나 어획의 기회를 갖지 못하다 85일째 되는 날 거대한 청새치를 잡게된다. 이틀간의 악전고투 끝에 이를 잡아 돌아오지만 상어가 나타나 노인이 이를 몇 마리를 죽이고, 항구에 돌아와 보니 또 다른 상어들이 그 물고기를 다 뜯어먹고 머리와 뼈만 남아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다. 작가의 역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힘차고 간결한 문장과 짧은 분량이 아닌 상태에서 이런 줄거리가 이 책의 전부였다면 읽어나가면서 따분하고 몹시 견디기 어려운 책이 됐을지도 모르겠을 만큼 실로 간단한 내용이다. 1958년 영화화되었다는데 책에 여운이 아직도 한참 남았기에 꼭 챙겨볼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문호로 일컬어지는 그이지만 창작의 과정에서 겪는 고통이 어느 영역에서든 그렇겠지만 그에게 실로 고통스럽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 하단의 박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에게도 과거 작품을 답습했다는 혹평을 듣던 시절이 있었고 아마도 이 기간은 그의 암흑시기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84일 동안 아무 소득 없던 산티아고는 인간군상을 표현하기 이전에 헤밍웨이 자신을 투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비록 다음 창작물이 종전과 같은 부정적 반응을 얻더라도 그 과정에서 자신이 발휘한 인내와 의지는 남겨진 물고기의 뼈마냥 남겨질 것이란 결연한 마음가짐을 보여주려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하단은 이와 관련하여 헤밍웨이를 소개한 글을 발췌 인용한 것이다. 볼드체는 작품에 연관된 내용이라 생각하는 것을 표시한 것.

 일생 동안 헤밍웨이가 몰두했던 주제는 전쟁이나 야생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삶과 죽음의 문제, 인간의 선천적인 존재 조건의 비극과, 그 운명에 맞닥뜨린 개인의 승리와 패배 등이었다. 본인의 삶 또한 그러한 상황에 역동적으로 참여하는 드라마틱한 일생이었다. 당시 스무 살의 나이에 경험한 세계 1차대전을 비롯하여 그는 스페인 내전과 터키 내전에도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쿠바 북부 해안 경계 근무에 자원했다. 이런 그의 경험은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했는데 이탈리아 밀라노 병원에서 한 간호사와 나눈 사랑은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의 소재가 되었으며, 1936년 에스파냐내란 발발과 함께 그는 공화정부군에 가담하여 활약, 그 체험에서 스파이 활동을 다룬 희곡 『제5열(第五列) The Fifth Column』(1938)이 탄생되었고, 다시 1940년에 에스파냐 내란을 배경으로『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를 썼다. 


이처럼 전쟁을 소재로 한 헤밍웨이의 소설들은 모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통과 단절된 젊은 세대들을 일컫는 '잃어버린 세대(the lost generation)'를 대변하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들은 헤밍웨이를 20세기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0년간의 침묵을 깨고 발표한 『강을 건너 숲 속으로 Across the River and into the Trees』(1950)는 예전의 소설의 재판(再版)이라 해서 좋지 못한 평을 얻었지만, 다음 작품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1952)는 대어(大魚)를 낚으려고 분투하는 늙은 어부의 불굴의 정신과 고상한 모습을 간결하고 힘찬 문체로 묘사한 단편이다. 
심볼리즘과 운율을 유감없이 구사하여 그린 용기있는 한 남성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생전에 쓰기를 벼르다가 끝내 쓰고야 만 작품'이라고 작가 자신이 말한 니힐리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작품으로 헤밍웨이는 1953년 퓰리처상과, 195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출처



소설이란 있을 법한 이야기를 가지고 지은이의 경험과 상상, 그리고 사상을 동원해 만드는 하나의 재창조된 세계다. 이 작품은 큰 관점에서 헤밍웨이가 삶에 대해 가지는 그의 전반적인 실존철학에 기반한 시선을 풀어 놓은 작품이라고 느꼈다. 전체적인 배경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특히나 주요 배경이 바다라는 점이 그러하다.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만큼이나 그 자체로 깊고 넓고 이야기가 많은 바다. 우리들의 인생처럼 그 굴곡과 역동성 만큼이나 변화무쌍하고 한치 앞도 알 수 없다는 점이 닮았으며 삶의 터전이기에 인간과 한없이 가깝다. 또한 세상에 큰 물줄기들을 낮은 곳에서 모두 담아들이는 포용성. 더불어 태초에 생명체가 태어난 원시의 근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바다의 이러한 점들을 찬양해왔고 그 위대함과 원대성을 것들에 빗대어 표현하기를 즐기며 흠모하였다.


이렇게 커다랗고 야생성이 넘치는 대자연의 일부인 바다 앞에서 대조적으로 주인공인 산티아고는 젊음도 없으며 심지어는 운조차도 없어 초라하기 그지 없다. 가진 것은 오로지 의지 뿐인 그다. 일손을 돕던 소년인 마놀린까지도 산티아고가 운이 없음을 이유로 부모가 함께 승선하는 것을 만류하는 상황에 이른다. 84일간의 수확이 없는 허무한 날들, 그리고 본인의 젊음과 가까이 두었던 마놀린의 젊은 기운까지도 얻은 것 하나 없이 모두 잃은 그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청새치의 살점마저도 상어에게 모두 잃는다. 그저 남은 것은 홀로된 고독함과 작은 배, 늙고 지친 그의 육신과 오랜 경험, 그리고 어떤 결과든지 수용하려하는 초연한 마음가짐과 노력하는 자세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런와중에 산티아고가 마을로 돌아오자 작품의 마지막에 누군가 "상어 꼬리가 저렇게 멋지고 근사한지 처음 알았네요."라고 말한다. 그 순간 바다는 우리들의 삶이 되고 고기잡이는 인생의 목표, 그리고 노인의 투지와 인내는 상어라는 시련을 이겨낸 영혼의 징표가 된어 압축된 삶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유한한 존재인 청새치의 살점은 애초에 큰 의미가 없었던 것마냥 이야기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노인은 사자꿈을 꾼다. 망망대해에서 바다의 포식자인 상어와 사투를 벌인 노인이 돌아와서 육지에서 손꼽히는 맹수인 백수의 왕인 사자의 꿈을 꾼다. 


헤밍웨이 자신의 작품이 어떠한 평가를 얻게되든지 자신의 노력한 사실 자체는 변치 않으리란 것을 말한 것 같고 나아가 인생 전반 그리고 사람들의 전 생애에 걸쳐 사람은 언젠가는 소멸하지만 그 과정에서의 정신은 남을 것이란 것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노인의 젊음을 가져가고 대자연이 그를 초라하게 만들지만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한 그는 스스로 받아들이고 또 하나의 자신을 만드는 과정으로 이를 승화시킨다. 작품이 탄생한 계기를 보면 어린 마놀린이 헤밍웨이 자신이며 하단의 박스에서 만난 어부에게서 듣고 느낀 바를 작품에 녹여낸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1952년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고급 유람선을 타고 쿠바 해안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노인이 탄 작은 고깃배가 거대한 청새치 한 마리와 사투를 벌이는 것을 목격한다. 

헤밍웨이가 탄 배는 노인을 도와 청새치를 끌어올렸다. 헤밍웨이가 탄 배 위로 가까스로 올라온 노인은 헤밍웨이에게 물 한 잔을 청했고, 헤밍웨이는 물 대신 시원한 맥주를 대접한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낚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친구가 됐다. 그 순간 헤밍웨이 머릿속에는 하나의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었다. 바로 `노인과 바다`였다.

출처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기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죽음 앞에서 만큼은 절대적으로 평등하다. 심지어 누군가는 매일 잠드는 것은 죽음을 연습하는 것과도 같다고 말한다. 결국에 우리는 모두 사라지기에 사후에도 스스로를 증명하는 길은 오로지 의지를 통해 삶을 개척하고 의미를 새기는 과정을 만드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싶어했던것 같다. 그런데 아이러니 아닌가? 지은이 헤밍웨이는 1953년 퓰리처상과 1954년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이 작품을 남기고 나중에는 결국 총으로 자살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이것은 법치를 논하며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었던 한비자가 학문을 나누었던 진나라 재상인 이사의 농간으로 고국 한나라도 잃고 결국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죽게 된 것 과 같은 맥락이란 느낌을 주었다. 헤밍웨이가 택한 배경인 변화무쌍한 바다처럼 인생은 그래서 알 수 없다는 것 아닐까. 생을 주어진대로 끝까지 살아내는 것 대신에 작품으로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고 그는 떠났다. 그는 스스로 죽는 시점을 선택했으니 파멸했지만 패배하지 않은 것인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형태로든 다른 것들을 죽이고 있는 거야.”

상어를 죽이는 산티아고가 했던 생각이다. 바다에서 혼자인 그에게는 위험한 상어조차도 친구이지만 현실은 이렇게 잔인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은 고통으로 가득찬 생을 살면서도 이를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산티아고를 통해 진정한 용기를 이야기하려 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니힐리즘적 성격을 가진 즉, 허무주의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는 시선이 있는데 이러한 성향은 책상 앞에서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전쟁과 다양한 스포츠와 취미생활에서 얻은 실질적 면과 이를 작품을 통해 다듬는 과정에서 작가가 느낀 아이러니와 모순들을 다시 꺼내어 재해석하고 다듬는 과정에서 생긴 태도인 것 같다. 이런 것 이외에도 그가 보여준 삶의 자취를 보면  냉정하고 마초적인 강인한 남성을 그리는데 이 책도 그러한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라고 산티아고가 말한 것이 이 책의 가장 본질적인 문구 아닐까. 복잡하고 차가운 현실과는 대비되게 살아있기만 하다면 인간의 몸은 얼마나 따뜻한가. 살아 있음 자체로 의미 있지만 냉혹하기만한 현실의 모순된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하던 시기에 이념이나 사상, 특별한 철학을 빌려오지 않고 단순한 소재로 인간의 본질과 삶의 희망에 대해 쓰고자한 그의 문학성에 다시 한번 감탄한다. 헤밍웨이 자신도 『노인과 바다』를 가리켜 “평생을 바쳐 쓴 글” “지금 내 능력으로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글”이라고 스스로 말했다고하니 말이다. 


참고


인생의 의미와 사자라는 단어 때문에 내게 떠오른 유명한 비유를 여기에 옮겨봤다.


 톨스토이의 인생비유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Tolstoi, 1828-1910) 의 인생비유입니다.

어떤 나그네가 산중에서 사자를 만나 도망치다가 절벽에 다다랐습니다.

마침 그곳에 칡덩굴이 있어 그 줄을 잡고 절벽에 내려가 절벽 중간쯤에

매달렸습니다. 조금 지나니까 사자가 따라와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으르렁대고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절벽 중간에 떠서 칡덩굴을 잡고, 사자의 으르렁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랫쪽을 내려다보니 바다의 큰 악어가 나타나 입을 벌리고

그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흰 들쥐 한 마리가 나그네가 메달려 있는

칡덩굴을 갉아 먹기 시작 했습니다. 또 그때 본즉 자기의 바로 곁에

꿀벌들이 날아와서는 풀잎에 꿀을 치고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위에서 부르짖는 사자의 소리를 들으며, 아래서 벌리고 있는

악어의 입을 내려다보면서, 또 자신의 생명줄인 칡덩굴을 갉아먹어 가는

흰쥐의 이발소리를 들으면서 나그네는 혀끝을 내밀어 그 풀잎의 꿀을

먹고 있었답니다. 이것이 곧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그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단의 박스는 인생과 관련한 유명한 비유인 붓다의 안수정등 이야기다.


 *안수정등 (岸樹井藤) 


안수(岸樹) 즉, '강기슭의 나무'란 본래 대반열반경에 이르기를, 
이 몸은 마치 험준한 강기슭에 위태롭게 서 있는 큰 나무와 같아서 무너지기 쉽다.
폭풍을 만나면 반드시 쓰러지기 때문이다'라고 설한 말씀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정등(井藤)은 '우물속의 등나무'라는 말이다. 
한사람이 망망한 광야를 가는데, 무서운 코끼리가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코끼리를 피하여 정신없이 달아나다 보니 언덕 밑에 우물이 있고, 등나무 넝쿨이 우물 속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사람은 등나무 넝쿨을 하나 붙들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우물 밑바닥에는 독사 네마리가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고, 또 우물 중턱의 사방을 둘러보니 작은뱀들이 혀를 낼름거리고 있다. 

할 수 없이 등나무 넝쿨을 생명줄로 삼아 우물 중간에 매달려 있자니, 두 팔은 아파서 빠지려고 하는데, 
설상가상으로 흰쥐와 검은쥐 두 마리가 번갈아 가며, 그 등넝쿨을 쏠아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일 쥐가 쏠아서 등나무 넝쿨이 끊어지거나, 두팔의 힘이 빠져서 아래로 떨어질 때는 독사들에게 잡아먹히는 수밖에 없는 신세다. 
그 때 머리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니, 등나무 위에 매달려 있는 벌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울, 다섯 방울, 이렇게 떨어져서 입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렇게 꿀을 받아먹는 동안엔 자기의 위태로운 처지도 모두 잊어버리고 황홀경에 도취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코끼리는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의미하고, 등나무 넝쿨은 생명을, 

검은쥐와 흰쥐는 밤과 낮을 의미한다. 작은 뱀들은 가끔씩 몸이 아픈 것이고, 독사는 죽음을 의미한다. 
달콤한 꿀물방울은 인간의 오욕락(五慾樂) - 재물, 이성, 음식, 명예, 편안함에의 욕망이다. 
급박한 상황에 놓여있으면서도 중생들은 그 꿀 한 방울에 애착하여 무상하고 위태로운 것을 모르고 있다. 
이렇게, 생사고해에서 헤매는 중생을 비유한 설화가 바로 '안수정등' 이야기이다. 
다시 올라갈 수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려갈 수도 없는 신세..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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