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은정 장편소설
임은정 지음 / 문화구창작동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법학을 공부했던 내게 익숙한 이름 세글자 '정원섭'. 법철학을 공부하던 시간에 배웠던 무수한 추상적인 단어들 중에 그 정점에 서 있던 것은 '정의'였다. 인권과 관련된 것들을 공부하면 법의 근원적 물음에 다가서야 하기 때문에 철학적 사고가 많이 요구되는데 나의 경우는 종국에 정의란 무엇인가로 귀결되곤 했었다. 물론 수업을 모두 마쳤어도 그 개념은 내게 여전히 모호하고 감히 범접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적어도 추상적인 단어는 개인마다 처한 시대와 상황별로 다양한 개념으로 가슴에 자리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 비춰봤을 때 내가 그의 입장이라면 이 땅에 정의가 있다고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1972 9 27일 가계 형편을 이유로 신학 대학 출신의 정원섭이 운영하던 만화가게 근처 논둑에서 여자 아이 사체가 발견되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게다가 아이는 춘천경찰서 역전파출소장의 9살짜리 딸아이. 소설 속에서는 2008년 춘천지방법원의 재심이 개시되는 시점으로 시작된다. 책 자체는 소설이지만 내부에서 밝혔듯이 대개의 사람들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29일에 춘천경찰서로 연행된 정원섭은 당시 사회적 여론을 의식한 내무부 장관 김현옥이 내린 시한부 검거령으로 10월 10일까지 잡아들일 것을 명령하자 연행 이후 갖은 고문에 의해 억지 자백을 하게 된다. 그가 수감 중에 수난일기를 써서 고문으로 인한 허위자백임을 알리려 무던히 노력하지만 수포로 돌아간다. 73년에는 드디어 무기징역이 선고되었고 고법 대법을 거쳐 드디어 무기징역이 확정된다.


징역살이 중에 위기가 있었지만 김재준 박사와 이우정 교수 등 지인들이 전해준 힘이되는 말을 계기로 자신의 수감태도를 바꿔서 교도소 내의 합창대와 악대를 조직하기도 한다. 84년에 이르러서는 무기징역에서 20년 유기징역으로 형이 감형된다. 87년 12월 24일 드디어 성탄절 특사로 가석방 되면서 15년 동안 이어진 그에게 내려진 자유의 박탈은 종지부를 찍는다. 하지만 진정한 투쟁은 이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는 재심을 위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회와 신문사 등지를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한 2001년 첫 재심 청구는 기각을 당한다. 다시 대법원에 재항고를 하였으나 반응은 없었고 이후 진정서와 탄원서를 계속 제출하여 사건의 부당함을 알렸다. 이후 노무현 정부에 들어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족되어 사건이 접수 된다. 결국 과거사위의 결정으로 재심을 권고받은 춘천지원에서 재심청구 서류를 접수하여 드디어 무죄판결을 받고 검사의 항소가 있었으나 기각되어 대법원에까지 상고하였으나 상당한 시일이 걸렸지만 종국에 일반 형사사건에 재심을 통한 무죄판결이라는 대한민국헌정사상 초유의 사건이 탄생한다. 아직도 그는 보상금 문제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예전 인터뷰 기사를 봤더니 그의 재심청구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의 답변이 의미심장하다. '용서하기 위해서, 용서를 하되 명예롭게 용서하기 위해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소설에서는 그의 학창시절로도 거슬러 올라가기에 젊은 그의 모습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책 말미의 참고 자료 속의 그는 그저 늙은 목회자다. 진실을 얻기 위한 시간의 무게가 당시 30대였던 그를 80대가 다 된 백발의 노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삐뚤어진 권력이 아이를 죽인 진범은 찾지도 못하고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놨다. 이런 경우가 어디 사법부만의 일일까? 큰 힘이 제대로 쓰이지 못하면 본연의 가치에 봉사하지 못하는 것은 입법 행정부도 매한가지다. 책을 모두 읽으면 힘의 근원과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우리의 성찰이 얼마나 필요한지 느낄 수 있다.


오래되고 빛바랬지만 고문과 위증 같은 요소 때문에 여전히 거칠고 부당하게 느껴지는 사건임에도 여류 작가가 나서서 책을 집필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다만 원사건과는 별개로 순옥이란 여성을 등장시켜 그녀의 살인 사건과 원섭의 사건을 교차시켜 극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좋았지만 내가 이미 사건의 내막을 아는 입장에서 읽으니 아무래도 조금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소설은 허구이고 있을 수 있는 일을 창착하는 것인데다 책 내용의 대개가 사실에 근거하였고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기에 그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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