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바빙크 평전 - 목회자, 교회 지도자, 정치가, 신학자
론 글리슨 지음, 윤석인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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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man Bavinck: Pastor, Churchman, Stateman, and Theologian (2010)

 


 

1. 이 책은 헤르만 바빙크의 인생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책의 부제에 나열한 모습들이 모두 어우러져 있다.



2. 만일 <개혁교의학>을 비롯한 바빙크의 신학 이야기를 풍성하게 원하는 독자라면, 이 책으로부터 큰 유익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혁교의학> 이외에 다른 바빙크의 신학적인 진술과 입장들은 골고루 나타난다. 특히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원 전 칭의나 중생 문제는 바빙크가 개혁주의 전통에 입각해서 많은 비평을 가했다. 책 마지막에 부록으로 실린 여섯 가지 강연 목차는 마치 바빙크의 강연 전문을 수록한 것 같지만, 아쉽게도 요약에 불과하다. (유해무 교수의 <헤르만 바빙크>는 신학, 특히 <개혁교의학>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러나 부록 E의 캄펜신학교 취임연설은 이 책의 가치를 더하는 대목이다.이 연설은 바빙크가 <개혁교의학>을 집필하기 훨씬 전이지만, 그 방법론과 기초에 해당하는 진술들을 모두 집약되어서 그의 젊은 시절 성숙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3.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은 바빙크의 삶을 추적한다. 그래서 아버지부터 네덜란드 교회의 분리파에 속했던 바빙크의 환경(sitz im Leben)을 서술하기 위해서 당시 네덜란드 교회의 역사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에 대한 정보를 풍부하게 제공한다. 네덜란드는 나폴레옹의 치하에서 벗어난 후 1816년 네덜란드 국가교회가 제도로 세워진다. 그러나 1834년에 신앙의 자유와 갱신을 따라서 소위 분리파(De Afscheiding)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국가교회로부터 나온다. 여기에 바빙크의 아버지가 속했다. 이어서 국가교회 목회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1886년에 떨어져 나온 입장이 소위 애통파(De Doleantie, 슬픔이나 비통의 뉘앙스)라고 불린다.



4. 그럼 이 책 전체를 꿰뚫는 요소는 무엇일까? 바빙크가 속한 분리파와 카이퍼가 속한 애통파의 교회 연합을 추진하고 신학교 통합을 계획하는 가운데, 여러 주요 인물들과 화합과 갈등이나 오해를 겪었던 일화와 이슈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카이퍼의 이름은 책 전체에 걸쳐서 계속 등장한다. 이를테면 카이퍼는 캄펜신학교(분리파에서 세운 신학교)에서 가르치던 바빙크를 자유대학교(애통파에서 세운 신학교)로 다섯 번 초빙하는데, 교의학이 아닌 셈어나 구약학 등의 자리를 제안했다. 흥미롭게도 바빙크가 결정을 번복하거나 많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바빙크의 아버지부터 내려오는 기질이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결국 마지막 다섯 번째 교의학 제안에 바빙크는 자유대학교로 가는데, 이는 카이퍼가 1901년 수상직 진출로 인해서 생긴 자신의 공석을 채운 것이다.



5. 교회정치와 사회정치로 이 책을 자칫 지루하고 건조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얀 바빙크(바빙크의 아버지)의 일화부터 시작하는 첫 장 '바빙크 가문 이야기'는 대단히 감동적이다. 하나님의 섭리 한복판에 서 있는 뜨거운 체험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동시에 바빙크의 생애 마지막 장면을 서술하는 저자의 필치 역시 매우 감미롭다.


 

"말년에 바빙크가 가장 자주 되풀이한 말은 '저는 믿음을 지켰습니다'였다. 이 짧은 문장은 바빙크의 일생을 요약했다. 그는 자신이 읽은 온갖 신학책과 철학 책에도 아랑곳없이 믿음을 지켰다. 바빙크는 기독교 개혁 교회와 통합된 교회에서 온갖 시련을 겪는 중에도 믿음을 지켰다. 내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는 과거에 자신이 싸우고 교회에 전수했던 그 믿음을 지켰다."

 



6.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집필과 그의 교회정치나 사회정치 활동은 조화를 이루기 어려워 보인다. 놀랍게도 바빙크는 40대에 <개혁교의학> 초판 출판을 성취했고, 그 이후 캄펜신학교를 넘어서 네덜란드 전역과 세계적인 활동과 영향력을 행사했다. 수많은 사건들과 갈등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이른 나이에 완숙한 그의 믿음과 업적은 경탄을 자아낸다. 그는 2-30대에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신앙으로 녹여냈던 것일까? 그는 50대에 이르러(1906-1911년) 2판을 출판했다. 아직 초판과 2판 사이에 차이는 구체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카이퍼가 연루된 칭의나 중생 주제는 변화가 있었다. 그의 삶을 둘러싼 복잡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쳐도 그의 신앙과 신학은 훨씬 견고했고 원숙했다. 참고로 그는 분리파 교회의 캄펜이 아니라 국가교회 소속의 레이던신학교에서 학위를 마친 최초의 분리파 교인이었다. 레이던신학교의 교수진들은 당시 독일의 주요 신학자들(하르낙 등)과 동일한 궤적(자유주의적 성향 또는 종교사학파적 입장)을 그리며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편향된 해석과 예수의 기적이나 부활을 거부하면서 인간 예수를 향하여 움직였다. 바빙크는 자신의 믿음을 위협하는 적들을 알고자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고자 분투했고, 그것을 삶으로 저술로 성공적으로 입증했다. 아마도 바빙크가 반혁명당의 지도자로 이후에는 상원의원으로 수년간 활약한 책의 후반부는 단지 <개혁교의학>의 저자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다.



7. 바빙크와 관련된 모든 일화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 저자는 바빙크가 손으로 쓴 모든 기록을 수집했다. 이는 다른 평전들과 입장을 달리하는 근거이기도 하고, 독자는 저자의 충실한 노력을 매 페이지마다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저자는 네덜란드어로 작성된 바 빙크의 중요한 전기나 평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에,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한글로 중요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흥미로운 에피소드 중 하나는 바빙크의 미국 여행기이다. 그는 게할더스 보스와 워필드가 활약하던 프린스턴신학교의 강연을 초대를 받아서 대서양을 건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라틴어와 독일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지만, 의외로 '능숙하지 못한' 영어로 인해서 준비한 강연의 영어 번역을 자문까지 받으면서 준비했다. 또한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목회자의 모습에 놀라고(바빙크가 흡연반대자는 아니다), 미국 목회자의 아내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비난했다.


 


8. 지금까지 네덜란드와 영미권에서 출판된 모든 바빙크 관련 저술들을 모두 아우르는 점에서 이 책은 바빙크 전기의 결정판이다. 또한 독자들에게 낯선 덜 유명하지만 중요한 인물들의 생애을 각주에서 꼼꼼하게 안내한다. 이는 네덜란드어에 능통한 저자가 1929년 네덜란드어로 쓰여진 <네덜란드 교회 기독교 백과사전>에서 인물정보를 빠짐없이 각주에 수록한 덕분이다. 더구나 한글 번역의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다. 다만 이 책이 한 사람의 생애 전반을 다루는 만큼, 복있는 사람의 <조지 윗필드>처럼 연대기를 제공하지 않은 점은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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