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부터 힘내라는 말을 싫어했다. 힘내라는 말은 대개 도저히 힘을 낼 수도, 낼 힘도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서야 다정하지만 너무 느지막하거나 무심해서 잔인하게 건네지곤 했고, 나를 힘 없게 만드는 주범인 바로 그 사람이 건넬 때도 많았다. 나는 너에게 병도 줬지만 약도 줬으니, 힘내. 힘들겠지만 어쨋든 알아서, 힘내. 세상에 "힘내" 라는 말처럼 힘없는 말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때만큼은 "힘내" 라는 말이 내 혀끝에서 만들어지는 순간, 매일매일 술이나 마시고 다니던 그 시간들 속에서 사실 나는 이 말이 듣고 싶었다는 걸,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무슨 의도로 말했든 상관없이. 그냥 그 말 그대로, 힘내. (p.60)
P는 꽤 근성이 있는 욕 선생이었다. 청하 두 병을 비울 때까지 우리들의 진지한 욕 레슨은 이어졌고, 슬슬 둘 다 혀가 풀리기 시작할 무렵, P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야, 그 정도면 됐어. 사실 욕이란 게 연습한다고 늘겠냐, 술 마신다고 늘겠냐. 그냥 사는 게 씨발스러우면 돼. 그러면 저절로 잘돼." (p.117)
이쯤에서 다시 강요의 문제로 돌아오자면. "진탕 마시고 속엣말 다 편하게 털어놓자" "취한 김에 비밀 하나씩만 이야기해봐" 같은, 조직된 ‘허심탄회 주의‘를 강요하는 술자리도 질색이다. 나는 아직 준비도 안 됐고, 딱히 당신과 그럴 생각이 없으며, 그럴 만한 관계도 아닌데 따옴표를 확 열고 들어오면 "제가 털어놓을 속엣말은요•••, 당장 집에 가고 싶어요" 말고는 할 말이 없어진다. 백지 위에서 쓱쓱쓱쓱 같이 뒹굴며 같이 뭉툭해지며 같이 허술해져가며 마음이 열리고 말이 열리는 건 일부러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상태‘이다. (p.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