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궁금했어. 진짜 네가 누군지. 숨는 놈 말고, 견디는 놈 말고, 네 인생을 상대하는 놈. 있기는 하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화가 났다. 잘 놀고 있다가 별안간 따귀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돌아서서 문짝에 등을 기댔다. 내가 제대로 들었다면, ‘존재의 징표‘ 에 대해 물은 거라면, 내놓을 것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나는 유령이었다. (p.240)
"(...) 너라면 어떻겠냐? 원하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날아다녔던 세상이 어느 날 갑자기 비행 금지구역으로 변해 있다면."
대답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날개 꺾인 독수리의 절망은 오리의 이해 영역 밖이었다. (p.284)
불쑥 불편한 마음이 앞에 나섰다. 벼랑 끝에 몰린 주제에 존재 운운하는 허풍쟁이가 아니꼬워서. 허풍쟁이를 아니꼬워하는 내가 초라해서. (p.286)
나는 진실에 얻어맞아 고꾸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진실은 내가 겁냈던 것만큼 거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내 그림자에 놀라 끝없이 달아났던 것인지도 모르고. 어쨋든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스스로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거라고. (p.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