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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달 ㅣ 알발리 시선집 2
이지선 지음 / 알발리 / 2025년 6월
평점 :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빛, 『흰달』이 건네는 위로의 언어
카라바조의 그림 앞에 선 적이 있는가.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한 줄기 빛이 인물의 얼굴을 비추는 순간, 우리는 그 극적인 대비 속에서 오히려 인간 내면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지선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흰달』은 바로 그런 책이다. 테네브리즘(암흑주의)이라 불리는 바로크 회화 기법처럼, 이 시집은 어둠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어둠 속에서만 도달할 수 있는 빛의 존재를 증명한다.
시인은 시집 서두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이야기"를 꺼내 보이겠다고 선언한다. 그 용기 있는 고백은 상처와 기억, 수치와 소외의 감정들로 가득한 언어의 그림자로 펼쳐진다. 「흰 달」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저 소리 / 벗어날 수 있는 건 오로지 죽음뿐일지도 모른다"라고 토로하는 화자는, 그럼에도 "캄캄한 하늘에 달을 띄워서라도" 살고 싶었던 한 인간의 절박함을 드러낸다. 이 절박함은 단순한 생존의 욕구가 아니다. 그것은 어둠을 통과하며 자신만의 빛을 찾아내려는, 실존적 몸부림의 기록이다.
『흰달』의 가장 큰 미덕은 어둠을 부정하거나 제거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인은 어둠과 빛이 함께 존재하는 변증법적 세계를 제시한다. "내 모습을 내가 볼 수 없어 다행인 이 밤들이 / 나의 존재를 잔인하게 확인시킨다"(「CCTV」)는 구절에서 보듯, 어둠은 고통이지만 동시에 자기 인식의 계기가 된다. 「장례식」의 "한 번도 꺼지지 않는 눈의 무게가 짓누르는 / 들리지 않는 총소리가 묵직하다"는 표현은 고요 속에 침잠된 폭력성을 감각적으로 포착해낸다.
시집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1장 '어둠의 색'은 과거의 상흔을 직시하는 여정이다. 14살의 사춘기, 새아빠, 겨울밤의 기억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이 파편들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현재의 자아를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들이다. 2장 '어둠이 진해지면 뜬다. 저마다의 달이'에서는 그 어둠을 통과한 이후의 세계가 펼쳐진다. "모두 다 가버리고 혼자 남은 그네에 앉아 / 말없이 흔들리고 있던 밤에도 / 홀로 뜬 달을 보며 / 행복해지자고 다짐을 해도 앞은 보이지 않았다"(「프랑켄슈타인」)는 구절은, 희망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 현실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달을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이미 희망의 씨앗임을 암시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꽃은 필 수 있다」다. "모두 꽃이 피는 과정을 보지 못했다"로 시작하는 이 시는, 꽃을 피운 사실조차 잊은 이들에게 꽃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는 화자의 모습을 그린다. 여기서 꽃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가능성과 아름다움의 은유다. 시인은 설명하고 또 설명하며, 타인의 내면에 숨은 빛을 끄집어내려 애쓴다. 이는 시인 자신이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낸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는 타인에게도 그 가능성을 전하려는 윤리적 태도로 읽힌다.
이지선 시인의 언어는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강렬하다. 과잉된 수사나 현학적 은유 대신, 일상적 소재와 구체적 이미지를 통해 독자의 감각을 직접 건드린다. 떡볶이, 어리굴젓, 치킨 같은 평범한 음식들, CCTV, 그네, 스키드마크 같은 일상의 파편들이 시적 공간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이러한 구체성은 시를 추상적 사유의 영역이 아닌, 살아 있는 경험의 차원으로 끌어내린다.
『흰달』은 상처에 대한 책이지만, 동시에 회복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시인은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달이 있다 / 가장 어두운, 또는 곧 사라질"이라고 말한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저마다의 어둠이 있고, 그 어둠 속에서 저마다의 달이 떠오른다. 그 달은 완벽한 보름달이 아닐 수도 있다. 흔들리는 초승달이거나, 곧 사라질 것 같은 희미한 빛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빛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기로 선택한다는 사실이다.
이 시집을 읽는 것은 한 편의 고백을 듣는 일이자,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시인이 용기 내어 꺼낸 "가장 하기 싫은 이야기"는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고, 마주하기 두려운 어둠이 있다. 『흰달』은 그 어둠을 회피하지 말고 직시하라고,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빛을 찾아내라고 조용히 권유한다.
이지선 시인은 관계 예술을 바탕으로 로컬 문학과 교육 프로그램에도 깊이 관여해온 작가다. 그녀의 시가 갖는 공동체적 감수성은 이번 시집에서도 빛을 발한다. 개인의 상처를 넘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치유의 길을 모색하려는 태도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흰달』은 한 개인의 고백록이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를 위한 위로의 언어이며,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 떠오른 흰 달처럼, 이 시집은 독자의 내면 깊숙한 곳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이 되어줄 것이다.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진정한 빛을 볼 수 있다는 진리를, 이지선 시인은 자신의 시적 언어로 증명해낸다.
*이 글은 알발리 서평단으로 도서를 받아 읽고 주관적견해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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