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자책] 관내 여행자-되기 ㅣ 둘이서 3
백가경.황유지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9월
평점 :
여행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대개 일상에서 벗어난 휴식이나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망이다. 그러나 백가경과 황유지가 『관내 여행자-되기』에서 제시하는 여행은 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이들의 여행은 망각하고 싶은 상처의 공간으로, 외면하고 싶은 역사의 현장으로 향한다. 이는 치유를 위한 여행이 아니라 아픔을 온전히 마주하기 위한 여행이다.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서 만난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만남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필연적인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건축물에 관심을 갖는 시인의 공간적 감수성과 "발아래 축적된 것"에 골몰하는 평론가의 역사적 사유가 만날 때, 단순한 답사나 기행문을 넘어선 깊이 있는 성찰이 가능해진다.
두 저자가 설정한 '관(管)'이라는 키워드는 이 책의 독특한 지점을 보여준다. 관은 단순히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는 지점이자 공간/현장"을 뜻하며, '관통'은 "사회와 개인이라는 공동의 기억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관계된 것"을 의미한다. 특히 '통(通)'에 담긴 중첩된 의미—"담아냄으로써(桶) 연결되는(通) 아픔(痛)들"—는 이들의 여행이 단순한 기록이 아닌 아픔의 연대임을 보여준다.
제목에 붙은 '-되기'는 들뢰즈 철학에서 차용한 개념으로, "너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닌 오롯이 그 자리에 놓이는 이해의 지향"을 뜻한다고 저자들은 설명한다. 이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섣부른 감정이입이나 동정을 경계하는 윤리적 태도를 보여준다.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함을 인정하면서도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 자리에 서려는 시도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다.
인천 성냥박물관에서 황유지가 어린 여공들의 삶에서 친척 언니의 삶을 겹쳐 보는 장면, 백가경이 동일방직 공장 터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항쟁을 되새기는 대목에서 우리는 개인적 기억과 집단적 기억이 만나는 지점을 목격한다. 이들은 역사의 증언자도 연구자도 아닌 "백치의 상태"로 그 공간에 서서, 그곳에 스며든 아픔을 자신의 몸으로 통과시킨다.
의정부 '뺏벌', 안산 단원고, 이태원 골목, 광주 5·18 현장, 서대문형무소, 이들이 찾아간 공간들은 모두 한국 현대사의 상처를 간직한 곳들이다. 그러나 이 책이 단순한 추모나 애도의 글쓰기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이들이 사회적·역사적 공간뿐만 아니라 개인적 공간인 고향, 일터, 등단의 길까지 동일한 관점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특히 성매매 여성들이 살았던 '뺏벌'을 다룬 부분에서 드러나는 시선은 주목할 만하다. 저자들은 그곳을 그곳밖에 살 수 없었던 여성들의 공간으로 인식하며, 단순한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고 그들의 삶의 조건을 이해하려 한다. 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온정주의적 시혜가 아닌, 구조적 폭력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보여준다.
둘이서 손을 잡고 길고 긴 관을 걸어서 결국 나온 것이 책의 핵심을 읽을 수 있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의 현실을 함께 걸으며 나누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통을 하나하나 두드려 가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안부를 묻는 것"—이것이 바로 이들이 실천하는 글쓰기의 윤리다.
두 저자는 각자의 전문 영역(시와 비평)에서 나름의 성취를 이룬 작가들이지만, 이 책에서는 오히려 전문가적 권위를 내려놓고 평범한 시민으로서, 아니 "백치의 상태"로 현실과 마주한다. 이러한 자세는 고통받는 타자에 대한 글쓰기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모범을 제시한다.
물론 이 책에도 한계는 있다. 때로는 감상적 서정에 기대는 대목들이 있고, 들뢰즈의 '-되기' 개념을 차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충분히 전개되지 않은 아쉬움도 있다. 또한 개인적 경험과 사회적 참사를 병치하는 구성이 자칫 사적 영역의 과잉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관내 여행자-되기』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이 책은 망각의 속도가 가속화되는 시대에 기억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 그곳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또한 타자의 고통에 대한 글쓰기가 어떻게 가능한지, 연대의 글쓰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보여준다.
세월호 참사 10주년, 이태원 참사 2주기를 맞는 지금, 이들의 여행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관내 여행자-되기는 한 번의 체험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하는 윤리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백가경과 황유지가 보여준 것은 바로 그러한 실천의 한 가지 가능성이다.
백가경·황유지, 『관내 여행자-되기』(열린책들, 2024) 서평
* 위 글은 문화충전 서평단으로 출판사에서 무상제공한 책을 읽고 주관적 견해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문화충전 #열린책들 #관내여행자-되기 # 백가경 #황유지 #둘이서 #관내여행 #서대문형무소 #세월호참사 #이태원참사 #타자의고통 #문화충전서평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