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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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더듬증

그것이 빛으로서 도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겉으로 드러날 때도 아닐 때도 있겠지만, 나의 이야기를 해야 할 때면 나 또한 마음속 말더듬증이 도지고 마는 것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각색하고 편집할 때면 혀를 굴려가며 유창해지던, 마구 울창해지던 그 마음이. ⠀

빛이 환하거나 아름답다는 것은 훗날의 가치판단이다. 정작 그 가치를 발산하였던 최초의 순간과 이들은 자신이 훗날 찬란이 될지 도깨비불이 될지 모르는 채 목울대를 떤다. 다만 가끔 부드럽고 윤활적인 이름들을, 이동휘 한승우 싱어롱 메아리 와 같은 유음들을 만나게 될 뿐. 만남들은 돌이킬 수 없지만 결국 소설 전체에서 가장 적게 나왔던 ‘나’의 이름, 각지고도 뭉툭한 이름을 끌어올린다. 결국 ‘나’의 이야기가 끝나던 밤, 엔딩크레딧의 가장 마지막 이름은 ‘김유경’이 된다.

#리본

성인이라 분류되는 나이에 가닿고,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최초로 “자발적 의사 표현”을 하기 위해 리본을 달 수 있는 자격의 갖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머리칼에 허리에 어쩌면 발목에 검열과 자기혐오의 리본을 질끈 묶게 되는 사건이다. 소설은 1970년대 말 서울의 여자대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2010년대 남녀공학 대학교를 재학 중인 나와 같은 “시간 궤도을 통과하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낚는 데 성공하는 사건은 여전히 hunting이 되고 여성의 현명함이란 “똑똑한 걸 드러내지 않고 그 똑똑함으로 남자에게 헌신하는 태도”라는 사회의 정의 또한 유효하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이 소설이었던 적은, 여성들이 공주인 적은 ‘없다’.

#어차피

이 소설과 같은 과거를 통과해온 독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겠지만, 그 이후 세대의 독자들은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혹은 영화 써니 등을 떠올리며 책을 읽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후자에 해당하는 나는 사실 《응답하라 1988》을 굉장히 재밌게 봤음에도 당시 유행어였던 어남류라던가 어남택이라던가 하는 “어차피 남편은 누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가부장적 집안의 둘째 딸로서의 덕선, 유신정권시대 속 청소년으로서의 덕선, 우정과 성장에 탁월한 덕선의 결말은 어째서 ‘어차피’ ‘남편’ ‘타인의 이름’처럼 다짜고짜 결과중심적이고 타성에 젖은 낱말들로 귀결되어야 하나. 그래서 “어차피 유경은 자신” 쯤으로 줄여볼 수 있을 은희경 작가님의 《빛의 과거》가 더욱 낯설고 또 환상적으로 반가웠다. ⠀

+) 참고로 이 책은 10년 전부터 기획됐다고 합니다

++) 다가오는 추석에 엄마께 선물하기로!♡ 역시 갓 은희경님,,


p13 계속해서 다음 권이 출간되는 문제집 시리즈를 풀어가듯 주어진 생을 감당하며 살아왔을 뿐이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녀에게서 나의 또 다른 생의 긴 알리바이를 보았던 것이다.

p42 몸과 마음이 분주한데도 시간은 너무나 느리게 흘러갔다. 긴장 속에 지루함이 이어지고, 쫓기면서도 침체돼 있는 이상한 시간 궤도를 통과하고 있었다.

p112 약점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하나를 더 가진다. (...) 그들에게는 자신의 약점이 어떻게 취급당하는가를 통해 세상을 읽는 영역이 있다. 약점이 세상을 정찰하기 위한 레이더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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