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기로 했다
앤드루 포스소펠 지음, 이주혜 옮김 / 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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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되고 일주일 후에 절망적인 계획을 짰다.

우리 집 뒷문을 나와 계속 걷는다면 어떨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장을 덮은 후 구글에 ‘인류 진화과정’을 검색해보았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굽은 등보다도, 호모 에렉투스의 수북한 털보다도 눈에 들어온 것은 그들의 걷는 행위, 사백만 년 동안의 ‘걸음’이었다. 아이의 첫 걸음마가 세상으로부터의 초대라면, 고통이 수반되기 시작하는 노인의 걸음은 알 수 없는 곳으로의 회귀이다. 이 책은 인간의 특성이자 본성인 걸음 자체와 그로인한 대화들에서 비롯되었다. 순례나 피난이 아닌, 온전하게 자의적인 걸음은 한 권의 책으로 기록됨직 했다.

  [WAKING TO LISTEN] 저자는 배낭에 알림판 하나를 달랑 건 채 2011년 10월 14일부터 2012년 9월 8일까지, 스물셋의 가을부터 스물넷의 가을까지, 펜실베이니아주 채즈퍼드에서 캘리포니아주 하프문베이까지(6400km) 미국을 ‘걸어서’ 횡단했다. 심지어 이어폰이나 스마트폰에도 의지하지 않고(나는 사실 이 점이 더욱 놀라웠다 !), 대륙 위에서 생전 처음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만을 여행의 BGM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충동적인 그의 선택과 도보여행의 동기가 공감되지 않았고, 실제로 이행할 수 있는 그의 여건과 환경에 거리감이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사막에서 길을 잃은 와중에도 사유할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자전거로 세계 일주 중이었던 한국인 혹은 나바호족 원주민들과도 소통할 수 있을 만큼 열린 사람인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걷기로 했다, 라는 제목 중 ‘걷기’가 이 책의 소재라면 마지막 어절인 ‘했다’는 책의 주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삶의 이유와 자아를 찾는다는 거창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과 같은 물음이 주어진다면 나는 벽돌만한 책들에 파묻히거나 아예 산속으로 들어버리거나 하는 비일상을 가정해보았을 것이다. 더불어 실현 가능성과도 멀어진다. 하지만 현재 작가이자 평화운동가로 활동 중인 앤드루 포스소펠은 그저 ‘걷기로 했다’. 어제도 했고, 내일도 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그 단순한 행위를 말이다. “____(하)기로 했다”. 이 문장 속엔 어떤 행위도, 어떤 인생도 대입이 가능하다.

*)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TRANSOM.ORG와 COWBIRD.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p14 그저 함께 있는 게 중요했다. 조지아주의 작은 읍에서 만난 두 명의 미국인, 큼직한 푸른 행성의 두 인간, 광활한 우주의 두 지구인이면 되었다.

p478 내가 걸어 오르는 계단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나는 잠시 멈추고 그것이 실제인지 생각해본다. 내가 먹고 마시는 사실은 위대한 작가들과 학파들에 비견할 만한 장관이고, 내 창문에서 바라보는 나팔꽃은 형이상학적인 책들보다 더 흡족하다. (휘트니의 시 인용)

p495-496 커피와 허니 번이 기념비적으로 중요해졌다. 나는 거의 숭배에 가까운 마음으로 커피를 마시고 허니 번을 먹었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이 긴 걷기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러 이만큼이나 의미심장해질 수 있다면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게 될까? 언젠가 생의 마지막 날이 되어 허니 번을 먹게 되면 얼마나 달콤하고 기이하고 슬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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