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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겠다는 마음
오성은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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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아내는 창고가 되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싱크대와 냉장고 사이에 드러난 좁은 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표정이나 숨소리는 차분해 보였다. 나는 아내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아내는 밀크셰이크로 아침식사를 해결한 듯 보였다. 나는 물을 한 잔 마시고 어젯밤에 만들어둔 카레를 데워 밥을 비볐다. 카레를 숟가락으로 저으니 가라앉아 있던 당근이 떠올랐다. 내가 한술 떠먹기 시작하자 아내는 뒤돌아서서 말했다.

창고는 우선 눈, , 입이 없어야 해요. 귀만 있어도 충분할 것 같아요.” 창고와 라디오

 

흰 바탕 위에는 텍스트 커서가 깜박이고 있었다. 문득 그 작고 검은 커서의 규칙적인 명멸이 누군가 은밀하게 보내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오래전에 꿈꿔왔던 소설가에 대한 열망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음악 칼럼을 포기하면 진짜 소설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대로 가다가는 소설가와는 영영 멀어진 삶을 살아가게 될 게 뻔했다. 당장 내가 할 일은 마감으로부터의 탈출이고, 어쩌면 그건 새로운 도전에 가까운 의미이지 않을까. 핑크문

 

잠깐이면 돼.

울음소리가 점점 사나워졌다. K는 나비를 가방에 넣자마자 문을 닫았다. 나비는 몸을 튕기며 가방의 문에 부딪혔다. K는 서둘러 지퍼를 잠갔다. 수백 개의 갈고리가 촘촘히 맞물리며 완전히 잠겼다. K는 가방에서 느껴지는 나비의 발광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K는 서둘러 지퍼를 열고 가방 문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가방 안에는 나비도, 나비의 울음도, 나비를 긴장하게 한 공포도 없었다. 거기에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가방 안에 들어간 남자

 

 

언젠가 소설의 발견이라는 잡지로 접한 오성은의 첫 소설집이 나왔다. 한동안 일이 많아 리뷰는커녕 책을 읽을 시간조차 나지 않았는데, 이제 바쁜 일도 어느 정도 정리되어 슬슬 북스타그램을 다시 시작해야 되는데…… 고민하던 찰나, 은행나무에서 나온 리뷰어 공고를 보고는 덜컥 지원했다.

 

데뷔작 런웨이에서부터 돋보였던 서스펜스와 추리적 상황 설정은 이 책에 실린 몇몇 단편들에서도 돋보인다. 다만 이 작가의 경우에는 그러한 추리적 상황 설정이 전형적인 사건 해결의 구조를 따라간다기보다는 환상적 묘사로 굴절되거나, 아예 과거로 돌아가 오랫동안 머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 점이 한편으론 신선하기도 했다. 나로서는 이미 현재와 과거가 끊임없이 교차되는 서사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이렇게 현재와 과거를 양분하여 머무르는 이야기가 도리어 낯설게 느껴졌던 것 같다. 추천사를 쓴 함정임 소설가의 말처럼, 이 작가는 분노로 점철된 감정조차 오래된 시간의 문을 열고 마주하는 착색 삽화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이 있는 듯하다.

 

뒤쪽에 실린 허희 평론가의 글에서는 오성은 작가를 전방위 예술가라고 칭하고 있지만, 나는 그를 매체적 작가로 명명하고 싶다. 그는 TV와 라디오의 리포터와 진행자로 일한 경력이 있고, EP 앨범을 발표했으며, 단편영화를 포함한 영상 작업에도 꾸준히 천착할 뿐 아니라, 음악과 영화, 예술을 여행기로 묶은 에세이도 꾸준히 출간하고 있다. 실제로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각 소설에 등장하는 음악들닉 드레이크의 <핑크 문>, 비틀스의 <Something> 과 매체의 변화LP와 턴테이블, 악보, 라디오를 따라 읽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는 단순히 넓은 바운더리를 지닌 작가가 아니라, 자신이 지닌 예술적 역량을 활용하여 연주할 줄 아는 매체적 작가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매체란, 결국 어떤 작용을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전달하는 데 그 본질이 있다. 그 전달을 통해 이 소설집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무엇이 되고자 하는지, 어떤 되겠다는 마음을 지녔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창고가 되겠다는 마음은 무엇이고, 가방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마음은 또 무엇일까. 이들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 작가가 보내온 수신호를 온전해 해석할 수는 없지만, 평소 음악과 영화,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해서인지 소재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독서였다.

 

삶에 있어 중요한 전환을 앞둔 지금, 요즘의 나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지,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다들 한 번쯤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목적어가 빠졌기에 더욱 강렬한 되겠다는 마음을 느껴본 적 없으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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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뤼아르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21
폴 엘뤼아르 지음, 조윤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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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너는 따뜻하고 아양 부리는 네 손바닥 안이나

네 머리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안에서

아몬드 열매처럼 선박들이 맺혀 있는

파도를 붙잡아 둘 순 없겠니? (「세상의 첫 여인」)

-

네게 부족한 것은 밤이 아니라, 밤의 힘이니. (「밤」)

-

슬픔이여 잘 가

슬픔이여 어서 와

너는 천장의 윤곽 속에 새겨져 있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눈 속에 새겨져 있네 (「약간 일그러진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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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을 전복시키려고

삶을 살아간다

우리는 시간을 만든다 (「그녀의 갈망은 나만큼이나 크다」)

-

그리고 시계는 감지할 수 없는 자신의 꿈에서 내려온다

그리고 시냇물은 맹렬히 추격하고 석탄은 뒤떨어진다

그리고 협죽도는 빛을 황혼과 연결한다

그리고 감은 내 눈 속에 새벽이 뿌리내리고 있다 (「시계에서 새벽까지」)

-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불리는 폴 엘뤼아르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그는 다다의 실험기와 초현실주의 시기, 레지스탕스 운동기를 거치며 활발한 창작을 이어나갔다. 이번에 출판된 을유문화사의 『엘뤼아르 시 선집』은 엘뤼아르의 삶과 시적 경향을 총체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작품으로, 이미 로르카의 시 선집을 먼저 만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이 출판사의 시 선집을 항상 신뢰하는 편이다. 양차대전을 거치며 ‘순수한 언어’에서 ‘혁명에 봉사하는 초현실주의 운동’으로 이행해나가는 한 시인의 시 세계를 탐구하고 싶은 독자라면, 두말할 것 없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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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고고학 현대사상의 모험 3
미셸 푸코 지음, 이정우 옮김 / 민음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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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고고학이라고 진짜 고고학계 논문 마냥 한자를 덕지덕지 붙여 놨다. 한글 병기도 없이 한자만 떡하니 적어두는 건 독자에 대한 배려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아닌가? 밑댓의 말처럼 시대착오적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빡침이 몰려온다. 다 읽어보고 내용 및 번역 좋으면 별점 수정하러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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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이상하든
김희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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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불면증은 그냥 개인이 운영하는 조금 크고 멀끔한 구멍가게 같은 곳이다. 대기업이 전투적으로 확장하는 프랜차이즈가 아니다 보니 수익구조가 단순했다. 중간 유통 단계가 없어 불면증은 다른 편의점에 비해 물건값이 쌌다. 싸게 많이 팔자는 사장의 전략이 먹힌 것인지용케 경쟁에서 살아남은 불면증은 현재 4호점까지 불어난 상태였다. 사장의 최종 목표는 이 일대에 불면증을 세 개 더 늘리는 것이다. 누가 보면 돈 욕심이 많아서 그런 거냐고 오해할 테지만 속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15P

 

 

불면증이라는 편의점의 상호명이 눈길을 끄는 이 작품은 제목처럼 조금 이상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강박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 정해진과 사장님, 수녀복 차림으로 동네를 뛰어다니는 안승리와 우연히 방문했던 한국에서 본의 아니게 7년째 머무르고 있는 마크가 만들어나가는 관계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파동이 얼마나 다양하게 뻗어나갈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특별할 것 없는 잔잔한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조금 평범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서로의 이상함이 얼마나 이상하든그 이상함에 조금씩 익숙해지다 보면 세상에 이상한 사람과 이상한 삶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닐까. 서로의 이상함에 조금씩 스며드는 그들의 걸음을 응원해주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이 글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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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부부 오늘은 또 어디 감수광 - 제주에서 찾은 행복
루씨쏜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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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며 살았다. 큐레이터도 해보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화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언제나 그림이라는 틀 안에서 생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돈 생각하면 작가를 오래 못한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아러니하게도 모두가 돈 때문에 그림을 그만두었다. 돈이 너무 많아도 혹은 너무 없어도 하기 어려운 것이 예술이라 했던가. 정말 그랬다. 누군가는 돈이 많아져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누군가는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ㅡ22~23P

그렇게 친구들은 하나 둘 취업을 하거나 사업을 하며 그림과 관련 없는 직업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만나는 동기들은 나를 보고 놀란다. “네가 아직도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놀기 좋아하고 눈에 잘 띄지 않던 내가 졸업 후에도 진지하게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보면 다른 이들처럼 완벽을 추구하지 않고 그림 자체를 즐겁게 받아들였기에 지금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주변을 둘러보면 천재성이 보이거나 실력이 뛰어나 주목받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꾸준히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만이 남아 있다. ㅡ23P

작가로 산 지 어느덧 10년 남짓이 되었다. 누군가는 내게 좋아하는 일을 해서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좋아하는 일 한 가지를 하기 위해 열 가지를 포기하며 산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직업과 취미와 삶이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게으른 사람도 예술가가 될 수 있지만 게을러서는 예술가로 살아남을 수 없다. ㅡ26~27P

오랜만에 가벼워 보이는(그러나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에세이를 읽었다. 제주도에서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루씨쏜이라는 작가이다.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이곳저곳을 헤맨 삶을 담담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왠지 낯설지 않다.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를 헤맸던 그의 모습이 어쩐지 나의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일까. 나는 지금도 독일 서부 에센(Essen)이라는 도시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특별히 위의 글을 인용한 것은 최근 들어 부쩍 현실적인 고민이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떠나고 싶은 마음과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구분한다는 것이 아직도 내겐 어렵다. 이십 대 초반부터 일 벌이기를 좋아했다. 어느새 이십대 후반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전히 ‘시작 중독증’을 앓고 있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은 좋아하는데, 그것이 충분히 무르익을 때까지는 지속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게으름과 산만함을 언제나 아름다움으로 치장하려 한다. 방황하는 삶의 순간에 시적인 문구를 갖다 붙이며 시작詩作이라는 합리화를 덧입힌다. 지독한 고질병이다. 

그러나 나는 시작이 좋다. 한때 중독증세가 화두가 되었던 게임도 지금은 E-SPORTS로 당당히 자리 잡았듯, 처음에는 두려웠던 시작중독증이 지금의 나에게는 하나의 게임이자 삶이다. 이제는 내가 짧게 지었던 시들을 엮어 하나의 유기적인 작품을 만들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지금까지의 삶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목표 하나가 생겼는데, 내가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금까지의 내 삶을 완벽히 대변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일을 통해 나는 “직업과 취미와 삶이 모두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게 된다. 지금으로서는 그 목표를 위해 다시 시작의 힘을 믿을 수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먼저 게으름부터 어떻게 해보자!


이 글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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