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은의 가게
이서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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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마은'은 마흔을 앞두고 무엇 하나 이룬 것이 없어서, 먹고살기 위해 작은 가게를 열게 된다. 그래서 소소하지만 따뜻하고 행복한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다.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크기와 무게의 책을 손에 들고, 역시나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고 조금의 거짓말도 보태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한 권을 뚝딱 읽어버렸다. 그런데 책을 읽기 전의 마음과 읽은 후의 마음은 완연하게 달라졌다.
대한민국에서 자영업자로 살아남으려면, 여자로 살아가려면 또는 청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될 일들, 또는 이미 겪은 일들이 떠올라서 속이 상하고 화가 났다. 나는 자영업을 해보지 않았지만, 미래가 막막할 때는 막연하게 '카페나 서점 같은 가게를 운영해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었다.(자본과 실행력이 없어 실현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내가 가게를 차렸다면 충분히 겪었을 수도 있는 부당한 일들이 이렇게 많이 도처에 널려있다니. 부당함에 화가 나지만 손쓸 수 없어 무기력함을 느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는 그 마음이 어떨지 너무 잘 알아서 공감하며 몰입할 수 있었다. 또한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불안함을 느끼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굉장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해코지가 무서워 입을 다물어야 하는 상황들을 얼마나 많이 목격하고 경험했는가.
주인공의 이모는 나에게 워너비 같은 인물이다. '힘과 체구로 판가름이 나는 먹이사슬' 안에서 '총이 등장하는 순간 힘의 세기가 동등해질 수 있기에 총기 규제를 반대한다'는 이모님. 실제로 총기 규제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강한 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한 자 앞에서만 강한 모습을 보이는 비겁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십여 년간 교직 생활을 하며 느꼈던 슬픔 중 하나가 그 어린아이들도 누구 앞에서 꼬리를 내려야 하고, 누구 앞에서는 고개를 치켜들어도 되는지를 본능적으로 안다는 사실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이미 숱하게 보며 자라왔기에 그러한 폭력적인 모습이 자연스레 드러난다. 더 비참한 사실은 그 순간에도 슬픔을 느끼는 것 외에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건과 그 당시 느꼈던 감정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하게 만들었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향해 쓴 글일 텐데, 백 퍼센트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과 필력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헤쳐나가며 생활을 지속하고, 그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타인을 배려하고, 희망을 발견한다. 현실에서는 구멍가게가 대박 나서 돈방석에 앉는다거나, 직장에서 초고속 승진을 한다거나, 찌질한 전 남자친구가 떠나고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난다거나 하는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극적인 성공은 없지만 그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힘든 하루 끝에 다정한 얼굴을 마주하고 맥주 한 캔을 마실 수 있어서 행복을 느끼고 다음 날 사용할 에너지를 얻는 것이 아닐까.
마은의 가게는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이처럼 '진짜' 이야기를 한다. 허황되고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우리네 삶을 보여준다. 그래서 책을 덮은 뒤에도 입안이 씁쓸하고 꺼끌꺼끌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위안이 된다. '그래, 다들 이렇게 사는 거지. 내가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구나. 지금처럼 조금만 더 힘을 내서 살아볼까.' 하며 아주 작은 의욕도 생기고, 내 옆에도 시시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고마움과 안도감도 느끼고 말이다.
책을 읽으며 시간을 낭비했다는 아쉬움이 전혀 들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직장 동료에게, 동네 친구에게 슬며시 권하고 싶어진다. 내가 당신 옆에서 시시하고 정다운 대화를 나눠주겠다고. 퇴근 후에 맥주 한 캔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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