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꿀 수 없는 세계에 대하여

- 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 피아노 치는 여자를 읽고

얼마 전 가까운 후배를 만났다. 후배는 몇 년 전 아버지를 암으로 잃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어렵게 꺼낸 후배의 이야기의 요지는 따로 방을 얻어 독립하고 싶다는 거였다. 마흔이 다 되어가는 후배는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어머니에게 언어폭력을 당해 왔고 어머니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다른 친척들이 자기에게 모욕을 주는 데도 어머니는 자신의 편이 아니었고 냉정하게 대했던 치욕스런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후배의 긴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위로해 주면서 나는 그럼 당장 방을 얻으라는 이야기를 했다. 후배가 편해지면 좋겠다는 격려와 어머니에게 얼마나 섭섭했겠냐고 위로를 했다. 대화가 오고가는 가운데 후배는 갑자기 화를 내면서 일어났다. 어머니가 있는 지금 집에서 사실은 벗어날 용기가 없다는 말만 남기고는 자리를 떠났다.

 

욕망을 표출하는 법을 모른다

후배도 에리카만큼은 아니지만 에리카와 에리카 어머니처럼 서로 할퀴고 화해하는 일상사를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상처를 주었지만 어머니라는 이름에 가려 참고 있어야만 하는 관계였다.

에리카는 어머니가 만든 작은 일인용 사립동물원에서 어려서부터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침묵하는 법부터 배웠다. 단단한 침묵의 죔쇠를 입술에 박아놓았다.(25쪽)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 볼 줄 모르고, 타인의 감정을 다독일 줄 모른다.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기에도 삶은 늘 버거웠다. 자신을 억눌렀던 욕망은 다른 방향으로 터져 나왔다.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고, 전차에서 사람들을 밀치고, 칼로 자신의 몸을 자해하며, 성행위를 훔쳐 보며, 자신의 지도 학생들을 괴롭히는 행위로 터뜨린다. 억눌려 있기에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보다 욕망을 드러내는 것에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욕망은 채워지지 않았고 늘 더 고팠다. 욕망은 더 새로워지고, 깊어지고, 핍쇼와 같은 금지된 장소로 에리카를 데려갔다.

제자인 클레머에게 사랑받고 싶고 공유하는 느낌을 받길 원하지만 반대로 자신을 노끈과 밧줄로 학대하라고 말한다. 자신을 폭력적으로 대하라고 클레머에게 편지를 썼지만 자신이 요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실제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요구할 줄 모른다. 이미 어머니에게서 많은 좌절을 겪어서이다.

 

예술도 힘을 잃다

예술은 삶에서 인간에게 힘을 주어야 한다. 인간과의 싸움, 세계와의 싸움과 화해 끝에 조화를 이루고 그 과정 속에서 맛보는 고뇌, 환희, 절망이 어우러져서 아름다운 한 세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런 예술은 에리카에게 고통을 몰아다 주었으며,(30쪽) 많은 사람을 내치게 만든 것으로 인식된다.(36쪽) 에리카의 제자이자 연인으로 다가오는 클레머는 음악을 예술이라는 의미로가 아니라 관료주의와 욕망의 화합물로 반응한다. 에리카는 예술을 아는 가장 강한 여자일 경우에 상대할 수 있는, 도전할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음악은 인간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5선이라는, 규칙이라는 쓰라린 억압(233쪽)의 이름으로 에리카를 폐쇄적인 세계에 가두었다. 영혼이 죽어버린 예술은 제자를 억압하고 다시. 제자가 스승을 성이라는 이름으로 지배하게 만드는, 왜곡된 세계를 만들어간다.

에리카가 예술분야에서 헌신했기에 받는 선물로 생각한 클레머는 구애 도중에 겪었던 좌절을 빌미로 분노로 대응해 올 뿐이다. 제목 ‘피아노를 치는 여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에리카는 피아노를 예술로서 승화시킬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 영혼 없이 건반을 두드리는, 음악원에서 피아노로 생계를 유지하는 여자이다. 고독한 예술가의 정상도 어머니가 밀어 올려줘야 올라갈 수 있다. 음계라는, 어머니라는 강력한 규칙과 규정, 명령 속에 갇혀 있는 예술은 에리카를 가두는 감옥에 불과했다.

 

다른 세계를 꿈꾸지 않는다

에리카에게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진정한 이성은 자유를 존재 조건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어머니 때문에 늘 인간다움은 억압당한다.

에리카가 새로운 환경을 꿈꾸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고통으로 다가온다. 이 뼈아픈 고통은 결국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에리카의 자학적인 행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만든 상처 안에서 당당히 상처를 벌려서 바라보며, 고통을 견뎌가는 법을 배우는 지도 모르겠다.

가스 밸브를 잠그듯, 그렇게 다른 세상과 대상에 대해서 벽을 쌓고 살아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을 꿈꾸게 되었다. 결국 사랑은 좌절되었다. 클레머에게 두드려 맞은 에리카는 그 다음날 아침 자신이 긴 세월동안 모든 것에 문을 걸어 잠그고 고립되어 살아왔는가에 대한 이유를 물을 수 있었다. 새로운 관계와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에리카는 칼을 들고 학교에 나간다. 클레머의 학교에 찾아가서 자신의 어깨에 칼을 꽂는다. 창문이 에리카에게 열리지 않는 것처럼 에리카에게 새롭고 밝은 세계가 펼쳐지지 않는다. 다시 에리카는 자신을 가두고 있는 자신의 집으로 걸음을 빨리해서 돌아간다.

이상이 미쯔비시 옥상에서 날아오르자고 외쳤던 것과 같은 일은 에리카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김기덕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서 사람들이 보기 싫어하는 진실을 적나라하게 기괴하고 왜곡되게 보여주어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처럼 ‘피아노 치는 여자’도 우리에게 기존의 어머니(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관계, 영혼을 구원해 줄 것 같은 예술, 희망적인 미래에 대해 새롭게 질문을 던지며 우리의 영혼을 후벼 판다. ‘피아노 치는 여자’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지닌 아름다운 세계로 우리를 끌고 가지 않는다. 왜곡되고, 기괴한 욕망 속에서 우리들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세계를 돌아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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